서울에서의 짧은 신학생 시절이 끝이 나고 이듬해 부산의 한 신학대학의 종교음악과에 입학하여 성악도가 되었습니다.
같은 과의 한 여학생의 권유로 그녀의 아버지가 시무하시는 부산 변두리의 산속 마을에 있는 한센씨병 환우들의 정착촌 교회의 전도사로 부임을 했습니다.
그곳에서 성가대를 지휘하고 중고등학생들을 맡아 가르치고 어린이 예배에 설교를 했습니다.
대학 기숙사에서 생활하던 저는 얼마 후에 교회의 허름한 전도사 사택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매일 산길을 걸어 내려와 대학에서 수업을 받고 저녁에는 어두운 산길을 걸어 올라 사택으로 돌아가는 길은 행복했습니다.
얼마 후에는 교회에서 중고등학생들과 졸업을 한지 오래된 청년들을 모아놓고 야학을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 마을의 아이들에게 꿈을 불어넣고 싶었습니다.
교수가 된 제자
용득이는 제가 그 교회로 부임했을 때에 중학교 3학년의 착하고 성실한 아이였습니다. 산속마을의 사택에서 혼자 지내던 저는 늘 용득이와 함께 지냈습니다. 스무 명 남짓되는 중고등부 아이들을 위해 매주 칼럼을 써서 주보를 만들었습니다. 간혹 그에게도 글을 쓰게 했습니다.
용득이는 글도 잘 쓰고 축구도 야구도 잘했습니다.
토요일이면 동네 아이들을 데리고 산 아래 마을에 있는 대중목욕탕엘 갔습니다. 아이들은 목욕 후에 먹는 자장면을 그렇게도 좋아했습니다. 매주 아이들은 모두 다 곱빼기를 시켰는데 그들에게 자장면을 사줄 수 있는 돈이 제게는 항상 충분했습니다. 교회에서 그때 받은 사례금은 제가 다니던 신학교의 전도사들 가운데 가장 많은 액수였습니다.
몸이 약했던 저는 그 자장면 곱빼기를 항상 남겼습니다. 인식이는 늘 제가 남긴 자장면을 받아 먹었던 마르고 키가 큰 아이였습니다. 삼십 년이 훌쩍 지난 어느 날 인식이는 선물을 가득 사들고 저를 찾아오기도 했었습니다.
저는 그 교회에서 삼 년 육 개월을 그 산속에서 살며 사역을 했는데 참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어느 해 여름 바닷가로 수련회를 떠났는데 중1 여학생이었던 대순이는 바다에 떠다니는 스티로폼을 안고 수영을 하다 그만 너무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물에 빠져 허우적거렸는데 제가 들어가 그 아이를 구했지요 그 대순이는 지금 전도사님이 되었습니다.
용득이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교로 갈려고 했지만 제가 조언을 하기를 일반대학을 졸업하고 신학교로 가라고 하는 바람에 부산의 한 대학의 철학과를 진학을 했습니다.
그의 품성 그대로 학교생활에 충실했고 제가 그 교회를 사임하고 서울로 가게 되었는데 용득이는 그 후로도 철학공부에 깊이 빠졌습니다.
슬프게도 용득이는 그 후에 교회를 떠나 대학원을 진학했고 20대 끝자락에 박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 대학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언젠가 만난 자리에서 어떻게 네가 교회를 떠날 수 있냐고 나무라는 저를 보며, "신학교로 갈려는 저를 철학과로 보내지 않으셨냐." 며 웃으며 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