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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다윗 Jan 13. 2024

나는 교회가 전부였습니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의 나의 삶은 교회가 전부였습니다. 학교에선 반장을 했지만 학교생활에 나는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집이 아니라 교회 지하실에서 생활하며 학교를 다녔습니다. 국어와 영어과목은 재미가 있고 성적이 좋았지만 다른 교과성적은 점차 흥미를 잃었습니다.


지금처럼 휴학이나 자퇴가 쉬웠더라면 백 번이고 학교를 그만두었을 것입니다.


한 번은 아버지께 학교를 그만두었으면 한다는 말씀을 드렸지만 아버지는 허락하시지 않았습니다.


교회 중고등부 회장시절에는 마치 전도사처럼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주일 저녁예배 찬양을 인도했고 자주 있는 기도회를 인도했으며 그럴 때면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중고등부 성가대를 지휘했습니다.


방학이면 첫 주에 어린이 성경학교를 섬기고 둘째 주엔 학생회수련회에 참석했고 그다음 주엔 시골의 아버지가 목회하시는 교회에 가서 어린이 성경학교를 돕고 마지막 주간에 또 다른 시골교회에 가서 성경학교를 위해 봉사했습니다.


출석하는 교회의 목사님과 장로님들 그리고 어른들은 당연히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신학교로 진학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저의 학생회 회장의 임기가 고등학교 3학년 1학기 말에 끝나게 되었는데 당회에서는 저의 임기를 졸업할 때까지 연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제가 다녔던 교회는 중고등부를 졸업하는 졸업생들이 졸업을 하면서 교회에 선물을 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주로 철재 캐버넷을 교회에 기증했는데 저는 당시 아버지께서 매월 받아 보시던 월간목회라는 잡지에 광고로 나온 밀고 다닐 수 있는 화이트보드를 교회에 선물하고 싶었습니다. 그때가 1979년도 연말이었는데 그 가격이 72,000원이었습니다.


저는 그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밤마다 거리를 다니며 찹쌀떡을 팔았습니다.

짧지 않은 날들 동안 밤길을 헤매었지만 원했던 그 물품을 교회에 드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했지만 신학교로 간다는 생각에는 확신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1979년도 고등학교 3학년 6월에 현충일과 개교기념일  휴일을 이용해서 삼일 동안 금식기도를 드렸습니다.


금식하며 기도를 하는 중에 그 사흘이 마치기 5분 전에 난생처음 방언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듬해에 서울에 있는 신학교로 진학을 하여 신학생이 되었고 본격적으로 그 영광스러운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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