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다녔던 사당동의 신학대학의 뒷동산엔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가 무릎을 꿇을 수 있는 기도실이 몇 개가 있었습니다.
점심시간이나 방과 후에 그곳에 들어가 기도하는 시간이 신학대학의 신입생인 저는 마냥 즐거웠습니다.
그때는 1980년 봄이었습니다.
당시 대한민국은 혼란의 소용돌이로 어지러웠습니다. 우리 조국은 몸살을 앓고 있었습니다. 특히 대학가는 더 그랬습니다.
제가 다니던 신학교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하얀 본관의 벽엔 학장과 교단의 총회장의 이름이 빨간 글씨로 '물러나 퇴진하라'라고 휘갈겨 써져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대학의 어른들을 모두 어용(御用)으로 몰아붙였습니다.
선배들이 줄지어 '내 주는 강한 성이요'의 찬송을 부르며 행진하는 모습이 제게는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어린 가슴의 신학생인 저는 크게 슬펐습니다.
얼마 후 정문엔 탱크가 가로막고 있었고
수업은 이어갔지만 강의실은 어수선했었습니다.
그러다 마산과 부산에서 큰 소요가 일어났고 이어서 광주에서 큰일이 터졌습니다.
우린 그 일을 광주사태라고 불렀습니다.
급기야 학교는 휴교령이 떨어지고 교문은 굳게 잠겼습니다.
입주 가정교사로 있었던 저는 짐을 싸서 아버지가 목회하시는 시골로 낙향을 했습니다.
시골은 도시와는 달리 고요하고 평온했지만 마음은 어수선했습니다.
'네가 온 김에, '
아버지는 제가 시골에 도착하자 교우들을 위해 집회를 열자고 하셨습니다. 새벽집회에는 아버지가, 낮 집회에는 아버지의 누님이시자 재일(在日) 거류민단(居類民團) 여성 연합회 회장이셨던 저의 고모님이, 그리고 저녁집회에는 제가 설교하기로 하고 50일간의 여정으로 부흥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시골사람들은 매번 열심히 모였습니다.
저녁마다 말씀을 전해야 했던 저는 하루종일 기도를 드리며 교회 마룻바닥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평생을 설교자로 살아야 했던 제게는 잠시 몸 담았던 신학교에서보다 시골에서의 실천신학이 더 큰 배움의 시간이었습니다.
신학교 입학 때 장만했던 겨울양복을 입고 땀을 흘리며 설교를 하는 막내아들에게 여름 양복 한 벌을 맞추어 입히기 위해 저의 어머니는 몰래 장에 가셔서 오랜 세월을 간직하셨던 반지를 팔았습니다. 결코 그 돈으로 양복을 맞추지 않겠다고 떼를 썼지만 어머니의 눈물에 저는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다시 대학의 문은 열리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른 채 다시 대학의 문은 열렸습니다.
하지만 저는 다시 신학교로 돌아갈 마음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학교 뒷동산의 조그만 기도실이 그리웠지만 슬프게도 짧은 신학생 시절은 그렇게 끝이 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