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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다윗 Feb 03. 2024

나는 선교사였습니다

     서른을 갓 넘긴 저는 부산 근교의 작은 섬마을 교회의 담임전도사로 있었습니다.


그해 소련이 해체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저는 그 소식에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1991년 3월 저는 모스크바를 향하는 대한항공에 몸을 실었습니다.


섬마을 교회의 교우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선교사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늦은 밤 시각에 도착한 모스크바 세레메째예보2 국제공항 뜰에는 매연 냄새로 가득했습니다.


3월의 모스크바는 몸살을 겪고 있었습니다. 녹지 않은 눈이 넓은 도시와 벌판에 흉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식재료나 생활필수품은 넉넉하지 않았고 가게들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요기를 하려고 레스토랑을 찾아가면 식재료가 없어서 요리를 못한다는 말만 했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크다는 붉은 광장 곁에 서 있는 국영백화점인 굼(GUM)에도 상품이 없어 텅 비어 있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소련에 하나밖에 없다는 세계에서 제일 큰 맥도널드에서 햄버거를 하나 사려면 30분이나 줄을 서야 했습니다.


햄버거는 고사하고 주식인 빵을 사기에도 수월치 않았습니다.

설탕이나 보드카는 배급표가 있어야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리바꼬프의 소설 <아르바트의 아이들>에서 나오는 모스크바의 중심지 아르바트에 방을 구했습니다.


오래된 낡은 방 네 개짜리의 아파트엔 고려인 부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방 두 개를  제가 사용하기로 하고 그들과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월세는 미화 50달러였습니다.

소련 화폐인 루블화는 누구에게도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 집의 남자 주인인 오십 대 후반의 '룰랴 그리고리예비치'는 어느 공과대학의 실습 교수로 재직하는 이였습니다.

그의 아내는 '넬랴 빠블로브나'는 주택을 수리하고 관리하는 일을 하는 직장을 다니고 있었습니다.

모든 일터나 단체는 모두 국영기업이었습니다.


그해 오월 그들의 집에서 몇몇 친구들이 모여

노동절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그들과 인사를 나누고 생전 처음 그들이 권하는 보드카를 마시고 그들이 청한 노래를 불렀습니다.


저도 처음 불러보는 아리랑과 도라지 노래에 그들은 깊은 감동을 받았나 봅니다.


금세 그들과 친구가 되었고 내가 선교사라는 것을 안 무신론자이자 공산주의자인 그들이 나를 도와 내가 하는 일을 함께 하겠다고 목청을 돋우웠습니다.


그해 7월 7일에 그들의 도움으로 시내의 어느 강당을 빌려 교회를 시작했습니다.


모스크바에서의 선교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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