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직업은 세리였고 이름은 레위였다. 마태라고도 불렸지만 원래의 이름이 레위였음에 틀림없다. 마태는 로마식 이름으로 후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는 세리에 어울리지 않는 이름을 가진 것인지 레위라는 이름이 세리와는 맞지 않은 것인지, 여하튼 그는 이름과 맞지 않는 삶을 살고 있었다.
레위라는 이름
레위라는 이름은 레위 지파사람들이 자신의 아이들에게 붙여주던 이름이었다. 레위지파는 제사장들을 비롯한 성전에 종사하던 가문이다.
세리였던 그의 이름이 레위였다는 사실에 그에 대한 궁금증은 더 짙어진다.
‘레위’라는 이름은 ‘(하나님과) 연합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
레위의 아버지 알패오는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레위라 지었다. 알패오의 직업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여러 학자들은 그 역시 세리였을 것이라고 말한다. 당시의 세리는 세습이 가능한 직업이었다는 것이 그 이유다.
그렇다면 세리였던 아버지가 세리가 될 아들에게 레위라는 이름을 붙여준 이유는 뭘까?
세리가 된 사람들
로마정부가 이스라엘을 식민지로 끌어들이며 그들 정부에 충성할 세리들을 선발하는 과정에서 특별한 기술이나 세속적인 직업 활동이 없던 레위지파 사람들을 대거 중용했다는 학자들의 의견이 있다.
그렇다면 레위지파였던 레위가 세관의 세리로 살았다는 것은 납득이 가는 일이다.
레위라는 이름의 세리
하나님과 연합하다는 뜻의 이름을 가진 레위는 하나님이 아닌 로마 정부와 연합하고 있었다. 그의 깊은 심중을 누가 알리요만 어쨌든 그는 지금 로마정부를 위해 충성하는 세리임에는 틀림이 없다.
예수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세리
레위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와 동시대를 살아갈 뿐 아니라 예수가 살고 있는 같은 가버나움 땅에서 일하는 세리였다. 누구보다도 예수에 대한 소문을 잘 알고 있는 그였을 것이다. 그날도 네 사람이 매고 왔던 한 중풍 병자를 고치는 과정에서 그 병자의 죄를 사하는 문제로 서기관들과 한바탕 논쟁을 벌였던 예수를 그는 듣고 있었다. 성경에 대해선 서기관들보다도 더 아는 것이 없는 민초들도 그 예수가 옳은 일을 했음을 어찌 모르겠는 가.
먹고는 살만했을지 모르지만 인간이 어디 먹는 것에만 만족할 수 는 없지 않은가.
세리로 살아가는 레위의 가슴은 날이 갈수록 진리와 삶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을 것이다.
이름처럼 살고 싶다
세리라고 다 나쁜 사람은 물론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속해있는 집단을 향해 밀려드는 원망 소리와 비난에 또한 자유로울 사람은 없다. 그래서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은 그 집단에 자신을 더 깊이 던지기도 하고 더러는 남모르는 깊은 시름에 시달리기도 한다.
레위는 아마도 후자에 속한 슬픈 세리였을 것이다. 그는 레위라는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대신 마태라는 이름을 즐겨 사용했다. 그는 자신이 기록한 복음서에서 자신을 마태라고 소개한다. 하지만 그의 본명은 분명 레위였다.
그를 찾아 온 예수
예수는 그날 우연히 가버나움의 세관을 지나가다 레위를 보고 그를 부른 것이 아니었다. 레위가 예수를 알고 있었듯 예수도 그 고민하는 가슴으로 세관에 앉아있었던 그 세리를 잘 알고 있었다.
그날 예수는 한 중풍병자를 고치며 언쟁을 높였던 서기관들과 헤어지며 그 서기관들보다도 하나님의 나라를 더 애타게 기다려왔던 세리 레위에게로 발걸음을 옮긴 것이다. 그리고 세리 레위의 두 눈을 보며 그의 가슴을 흔들었다.
“일어나 나와 함께 가자”
자신의 인생길을 가로막고 서서 좁은 길로 가자는 그의 손짓을 깨닫고 세리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예수를 따랐다.
그는 미련 없이 자신이 앉았던 자리를 치웠다. 책상 위를 정리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원래 새 신을 얻는 아이는 이제껏 신었던 낡은 신에 마음이 없다. 그래서 ‘헌신짝을 버리듯 한다.’는 말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그 당시 상황을 기록한 레위 자신의 글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
“예수께서 그곳을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마태복음 9장 9절).”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레위는 생각해 볼 필요가 없었다. 그저 따랐다. 그는 지금 꿈을 꾸는 것이 아니다. 그저 잠시 외출을 해서 그 신통한 젊은 선지자와 차나 한잔 하자는 게 아니다. 그는 다른 인생을 향해 방금 전의 삶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의 설명은 간단하다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그 사건에 대한 그의 기록은 놀랄 만큼 간단하다. 아니 별 할말이 없는 듯하다. 그의 설명이 그렇게도 간단했던 것에 대한 해답은 그간의 수많은 고민이 너무나도 많았고 그간의 갈등이 너무나도 심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그 끝자락에서 예수를 만났고 그래서 그를 따랐다. 그것이 끝이었다. 더 이상의 생각은 필요 없었다. 그는 그 사실에 만족했고 그래서 책상을 엎었다.
원래 어중간한 사람들이 말이 많고 어쭙잖은 인생들이 자신에 관한 변명들을 길게 늘어놓는 법이다.
잔치 한번 하고
그날 저녁 레위의 집에서는 잔치가 열렸다.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집을 떠나기 전에 예수를 위해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고 그의 동료 세리들과의 작별을 위해 좋은 포도주를 내 놓았다.
그날 밤이 깊어 찬 이슬이 내릴 때 레위는 잠든 예수의 몸 위에 담요를 덮어 드리며 좁은 길로 향하는 자신의 인생을 칭찬하며 그도 예수의 곁에 누웠다. 팔레스타인 하늘의 별들은 그날따라 더 또렷이 반짝이며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민은 발전을 주기도 하지만 결단이야말로 변화를 가져다준다
비겁한 사람은 늘 고민하지만 용기 있는 사람은 결단을 한다. 겁 많은 사람은 늘 계획만을 늘어놓지만 용감한 사람은 늘 실행하는 사람이다.
레위는 진리를 위해 위선을 버렸다. 더 이상 고민하지 않기 위해 옳은 길을 택했다. 선명한 삶을 위해 그는 지저분한 액세서리들을 던져 버렸다. 그는 행복하기 위해 그를 둘러싼 멍에들을 끊어버렸다.
그리고 예수를 따랐다.
끝까지 달렸다
레위는 다시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고 앞만 보며 달렸다. 그는 그의 스승 예수가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간 후에도 그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 살며 에티오피아의 외딴 섬에서 참수 당하기가지 그의 길을 끝까지 달렸다.
그는 끝내 그의 이름처럼 하나님과 연합한 자로 그의 생을 마금했다.
모두 다 죽는 것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죽을 지를 생각해야 한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장차 죽을 것이라는 사실엔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 유한한 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선 깊이 생각하고 결단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까운 인생을 허비하고 죽음 앞에서 당황하고 못내 아쉬워한다.
죽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린 사는 일에 더욱 치열해져야 한다. 시간을 아끼고 삶을 절약하여 의미 있는 일에 집중력을 높여야 한다.
당신이 목숨 바쳐 살아야 할 인생
당신이 목숨 바쳐 살아갈 일을 만났다면 당신은 행복한 사람이다. 당신의 목숨마저 내 놓을 대상을 만났다면 당신은 축복받은 사람이다.
당신은 후회 없는 삶을 살 것이고 두려움 없이 이 세상과 싸워 이길 것이다. 그러한 당신을 세상의 역사는 쫓아갈 것이고 하늘에서도 당신은 큰 자가 될 것이다.
당신의 인생을 찾아라. 그리고 목숨 바쳐 그 인생을 살아라.
행복하기위해 사는 사람은 늘 불행의 그림자아래에서 삶을 보낸다. 하지만 진리를 위해 용기를 발휘하는 사람은 늘 행복의 나무그늘에서 그 열매를 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태복음 7장 13-14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