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가랴는 1세기 초 예수가 태어 날 무렵의 끝자락을 겨우 살아가던 예루살렘 성전의 연로한 제사장이었다. 그의 아내의 이름은 엘리사벳이다.
그리스도가 다윗 가문의 출신이었는데 반해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는 아론 가문의 제사장이었다. 그는 아론 가문 중에서도 아비야 반열 출신이었는데 다윗이 왕이었던 당시에 아론의 혈족이 많아지자, 다윗은 그들이 자신들의 직무를 더욱 철저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들을 24반열로 나누었다. 그들 가운데 여덟째가 아비야 반열로서, 아론의 맏아들인 엘르아살의 후손이었다.
사가랴의 아내도 아론의 후손이었는데. 그녀의 이름은 아론의 아내인 엘리세바와 같은 이름인 엘리사벳이었다. 제사장들은 아주 엄격하게 그들의 가문 내에서만 결혼하였다.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니
성서는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했다”라고 기록한다.
‘하나님 앞에서의 의인이라.’
이 얼마나 완벽하고 대단한 일인가.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시고 어디에나 계시며(遍在) 불꽃같은 눈으로 세상을 지켜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었다는 그들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일들을 우린 이제부터 지켜보아야 한다.
엘리사벳이 잉태하지 못하므로
사가랴의 아내 엘리사벳은 젊어서부터 불임 여성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평생을 자식이 없이 늙었다.
하지만 아직 그녀의 인생이 끝난 것이 아니다.
불임 여성이라는 사실은 말 많은 세상의 소문과 의사들의 판단일 뿐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은 그녀의 말라붙은 태속에서 이제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성소에서 주의 사자를 만나다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 직무를 감당하기위해 성소로 들어가서 분향하는 동안 백성들은 밖에서 기도하고 있었다.
그때 향단 오른쪽에서 하나님의 사자인 가브리엘이 나타났다.
이 세상 역사 가운데 가장 주목 받아 마땅할, 예수가 이 땅에 잉태되기 육 개월 전, 그 숨 막히는 황금 같은 역사의 정점에서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 가브리엘이 그를 만난다.
팔순이 된 노인 모세를 불러서 너무나도 엄청난 일을 맡기신 것처럼 하나님은 뜻이 계셔 그의 깊어질 대로 깊어진 그 인생의 황혼녘 끝자락에 서서 성소의 분향단에 분향하고 있던 사가랴를 찾아 오셨다. 어쩜 그가 성소에서 드리는 마지막 제사가 될지도 모르는 꽉 찬 인생의 말미에서 사가랴는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위해 그의 이름이 천사의 입을 통해 불리어졌다.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그가 평생을 의롭게 살며 하나님께 간구해 올려드린 그 기도가 하나도 빠짐없이 하나님께 들리어 진 것이다.
하나님께 높이 들린 그가 드린 평생의 기도는 어떠한 것이었을까.
젊은 날의 그는 한 가문의 남자로서 아들을 낳아 무자했던 자신의 부끄러움을 씻어내기를 원해 날마다 자식 낳기를 위해 간구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인생의 황혼녘까지 자신에게 자식이 없었다. 그는 자신에게 자식을 허락하시기를 간구하는 기도는 중단한지 오래였지만 한 사람의 유대인 제사장으로서 메시아가 이 땅에 오셔서 종 된 조국의 수치를 벗겨주시기를 위한 그의 간구는 중단하지 않았을 것임에 분명하다.
이제 그의 기도가 한꺼번에 응답되는 순간을 그는 성소에서 맞이하게 되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의인의 기도를 잊지 않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나는 찬양한다.
마땅히 응답되는 것이 기도이지만 어떤 사람들의 기도가 응답 되는지에 대해서 우린 간과해서는 안 된다. 기도라고 무조건 응답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의인들의 간구에 답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에 근거한 불변의 법칙이다. 우린 기도함에 있어 그 열심도 중요하지만 기도자의 의로움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기도는 목소리뿐만 아니라 삶의 향기로 드려져야 한다.
의인의 기도가 응답되는 법칙은 고전중의 고전이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아이를 출산하기에는 이미 불가능한 그의 아내였지만 ‘불가능’이란 단어는 하나님께는 어울리지 않는다. 하나님은 하시고자 하는 일을 하시는 분이며 그의 그 놀라운 은혜를 입는 사람은 언제나 역사 가운데에 항상 존재한다.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하나님은 기적을 만드시는 분이지만 그 기적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다. 하나님은 기적을 만들어 드시고 우리의 손을 내밀라 하신다.
‘요한’이란 이름은 사가랴가 증표로써 들고 있어야 할 씨앗이었다. 아직 아들은 생기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요한이란 이름의 디렉터리 아래로 생겨날 놀라운 일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사가랴의 믿음만이 가능한 것이다.
요단 이편의 느보산에서 요단 저편의 가나안을 내려다보는 모세처럼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베푸시는 기적의 저편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당신이 끊임없이 기도했다면 이미 당신의 마음속에는 요한이란 이름이 새겨진 씨앗이 가득해 있어야 한다. 요한이란 이름을 당신도 품고 있어야 한다.
내가 늙었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
그렇게도 의롭고 흠이 없는 삶을 살았던 믿음의 사람 사가랴였건만 천사가 전해준 그 엄청난 놀라움에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는 입을 막고 서있다.
그러한 그의 모습에 나는 그 의로웠던 제사장을 탓할 마음이 없다.
그것은 그의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사람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스케일이 너무나도 크시고 놀라우시기 때문이다.
그 신실한 늙은 제사장마저 놀라버린 하나님의 크나큰 응답을 보며 내 입속엔 ‘그 종에 그 하나님’이란 말이 자꾸 중얼거려진다.
오늘 날이라고 그러한 놀라운 기도와 응답이 없으란 법은 없다.
그러한 의롭고 경건하고 흠이 없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 시대에도 있다면 말이다.
그 신실했던 노부부의 신혼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이제 그들의 삶에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한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할 것이라고 이사야 선지자가 노래했던 가.
그들의 삶의 원천은 이 세상을 지으신 조물주에게 있으며 그들이 공급받는 에너지는 그 위대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들에겐 불가능이 없으며 그들로 인해 이 세상은 새로운 역사를 창조한다.
사가랴와 엘리사벳
나는 오늘의 노부부를 보면서 그렇게도 아름다운 삶을 살았던 그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부부를 파트너라고 말하는 것은 올바른 표현이 아니다. 파트너라 함은 단지 이해관계로 필요에 따라 그 만큼만 함께 하는 것이다.
부부는 파트너가 아니고 이제야 만난 한 몸이다. 부부는 커플인 것이다. 커플은 짝이라는 말이고 짝이라 함은 하나일 때는 온전하지 않다는 말이다.
제 아무리 명품 구두라 해도 한 짝으로는 온전한 값어치를 가질 수 없다. 아무리 훌륭한 악기가 있다 해도 그것을 연주하는 이 없으면 그것은 단지 하나의 장식품 밖에 되지 않는다. 짝은 함께 있을 때 그 가치를 발하며 커플은 서로의 가치를 확인시킨다.
나는 이제 열여덟 살이 된 큰 아들 필립에게 “너는 엄마 같은 사람을 아내로 만나야 하는데, 그런 사람이 이 세상에 또 있겠나.”라고 푸념 섞인 말을 한 적이 있는데,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없으면 제가 그렇게 만들면 되죠. 제가 엄마를 잘 아니까요.”
어느 분이 자신이 읽은 책의 내용을 들려준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아프리카의 어느 추장의 멋진 아들이 결혼을 하기위해 신부를 데려오는데 그 대가로 신부의 부모에게 양을 백 마리 주었다고 한다.
주변의 사람들은 그 신부를 보며 다들 양백마리는 그녀에게 과분하다고 말했다. 그 신부의 외모나 주변을 볼 때 양 열 마리면 족하다고 수군거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추장의 아들은 그 신부를 위해 기꺼이 양 백 마리를 지불한 것이다.
그런데 몇 년의 세월이 지난 후 많은 사람들은 알게 되었다. 그들이 비웃던 그 신부는 어느덧 양 백 마리의 가치가 되어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짝은 그 나머지 한 짝의 가치를 말해주는 것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던 부부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았던 사가랴와 엘리사벳 부부는 서로가 있어 서로를 빛나게 했던 부부임에 틀림이 없다. 그들은 함께 있어서 의로운 사람이었고 나란히 있어 그들은 흠이 없었다. 함께 맞잡은 손이 주의 율례를 행했고 그래서 그 둘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여자가 낳은 자중에 가장 큰 자라고 예수가 일컬었던 세례요한이 그 둘 사이에서 태어났음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