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현은 며칠 굶은 사람처럼 김치찌개를 입에 밀어 넣었다. 뜨거운지도 모른 채 그저 삼켜냈다. 그게 분노인지 음식인지 모르겠지만. 서우는 그런 가현을 보다 주방에서 케찹을 뿌린 계란말이 한 접시를 들고 와서 가현 앞에 내려놓았다. 천천히 먹어. 체할라. 서우의 한 마디에 가현은 잠시 멈칫하더니 물을 들이켰다. 제대로 된 밥을 이제 먹네. 이모 밥은 여전히 맛있다. 가현이 살짝 웃으며 말하자 서우도 조용히 웃었다.
가게 안에 이상원의 ‘비밀의 화원‘ 노래가 울려 퍼졌다. 쨍한 햇빛과 서늘한 바람에 어울렸다. 어느새 국밥을 다 비워낸 가현은 벽에 붙은 서현의 사진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가현과 놀이공원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서우는 그런 가현의 눈빛을 읽어내고 케이크 박스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가현의 동공이 커졌다. 뭐긴 뭐야. 언니가 좋아하는 치즈 케이크지. 가서 먹어. 장 좀 보고. 냉장고에 뭐 없으니까 여기서 밥 먹는 거잖아. 서우의 잔소리가 싫지 않은 듯 표정이 밝아졌다. 창백하던 그림자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집에 돌아온 가현은 냉장고에 장 본 음식들을 채워 넣었다. 반찬과 과일이 채워지자 냉장고도 속을 채워넣고 편한 상태가 된 것 같았다. 식탁 위에 둔 케이크를 꺼내 숟가락으로 퍼먹기 시작했다. 푹푹 쉽게 떠지는 케이크는 쉽게 넘어갔다. 그리고 쉽게 사라지겠지. 마음의 얼룩도 사라질거야. 그러다 보면 불행하지도 행복하지도 않게 살 수 있을거야. 이건 서현이 알려준 방법이었다. 힘이 없거나 우울할 때면 치즈 케이크를 퍼먹으며 마음의 상처도 소화시키는 것이었다. 가현을 따라다니던 서현의 그림자가 아주 조금 옅어졌다. 그때 봄이 생각났다. 가현은 케이크를 두 조각으로 잘라 무작정 밖을 나섰다.
봄의 가게 앞에서 처음처럼 머뭇거리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봄은 가현과 눈이 마주쳤고 갈던 얼음을 내려놓았다. 어서오세요. 가현은 천천히 봄에게 다가가 작은 박스 하나를 내밀었다. 열린 박스 안에는 아까 잘라온 케이크 두 조각이 들어 있었다. 서툰 칼자국 모양이 꼭 가현의 지금 모습처럼 보였다. 그냥…생각이 좀 나서요. 이거 맛있거든요. 드세요. 봄은 기분이 편안해진 듯 가현에게 의자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그리고 칵테일 하나를 만들기 시작했다.
온 더 락 잔에 황설탕 하나를 꺼내 위스키를 붓고 으깬다. 으깨는 소리는 마치 바다 앞 모래를 밟는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가현은 뭔가 시원한 바람을 맡는 기분이었다. 그 위에 얼음을 채우고 체리 시럽을 떨어트렸다. 얼음 사이로 파고드는 끈적함은 벗어날 수 없는 악몽처럼 매달렸다. 가니쉬를 넣고 오렌지 껍질까지 컵에 끼운 후 매끄럽게 케이크 옆에 자리를 소개했다. 올드 패션드. 단데, 좀 독해요. 그래서 케이크랑 같이 먹으면 좋을 것 같아서요. 가현은 조심스럽게 한 모금 술을 머금었다. 단 맛이 들어오고 위스키의 묵직하고 타는 느낌이 목을 휘감았다. 나른해지고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술보다 봄의 다정함에 안도한 것이다. 케이크를 한 입 떠먹는 봄의 모습을 한참 바라봤다. 따뜻하고 쓸쓸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