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시게 빛나는 낮이었다. 서우의 기분은 들여다보지도 않는지 팔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은 발을 구름 위로 내려놓았다. 오늘 아침은 좋았지만 불행했다. 언니 서현이 사준 곤색 자켓을 꺼내 입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검은색 슬랙스에 흰 색 단화를 신은 모습이 어색했다. 공기도 무게 있는 듯이 서우의 발등을 짓눌렀다. 염증이 고이거나, 터지진 않겠지만 언젠가 서우의 몸을 차지할 것 같았다. 한적한 거리였다. 길 끝 모퉁이를 돌면 나오는 카페였는데 잔잔한 재즈 음악이 흐르는 카페였다. 서현이 생전에 좋아했던 카페였다. 서우는 문을 망설임 없이 열고 들어갔다. 어서오세요. 사장님의 따뜻한 말 너머 누가봐도 깔끔한 정장 차림의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서우가 다가가자 남자는 고개를 돌렸다. 태현이었다. 탁자 위에는 휘핑크림이 잔뜩 올라간 초코 라떼가 녹아 흘러내렸다.
가현은 컵에 올라간 휘핑크림을 한 입 가득 물었다. 그래도 부족한지 음료를 쭉 들이켰다. 컵 밖의 이슬방울들은 제 자리를 벗어나 가현의 손가락 사이 혹은 얼음 사이로 스며들었다. 연우는 그런 가현을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괜찮아? 연우의 한 마디에 가현은 아차 싶었다. 티내고 싶지 않았는데. 연우는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 싸인 하면 끝나. 어차피 이걸 만든 건 나랑 서현이고, 시나리오 저작권은 너한테 있으니까. 바로 정지시킬게 게임. 이 세상에서 없애줄 수도 있어. 가현은 서류를 만지작 거렸다. 일단 정지시켜줘. 없애는 건 서우 의견 들어보고 그 다음에. 미안해 괜히 번거롭게 하네. 가현의 말에 연우는 어이없는 한숨을 뱉었다. 연우의 눈에는 가현은 항상 위태로웠다. 벼랑 끝에 서서 한 발을 이미 내딛은 사람처럼. 늘 그랬다. 가현을 살린 건 쌓아온 추억이었다. 그 추억을 그리다 후회없이 떠날까봐 무서웠다. 잃을 것 없는 가현이 잃을 것을 얻었으면 좋겠다는 마음 뿐이었다. 그래, 미안해 해. 실컷 미안해서 나한테 갚을 거 많이 만들어. 자주 보게. 가현은 허한 웃음을 지었다.
녹아내린 휘핑크림이 탁자에서 쉽게 떨어질 것 같지 않았다. 태현의 모습 같았다. 부드럽고 따까운 향수 냄새 안에 숨긴 모습. 서우는 날카롭고도 경멸의 눈빛으로 태현을 눈을 응시했다. 둘 사이의 정적이 얼음을 갉아 먹을 때쯤 태현이 입을 열었다. 웬일로 멀끔하게 입었네. 서우는 비웃음을 뱉으며 한숨을 길게 쉬었다. 그 한숨은 태현의 목을 조일 만큼 길고 단단했다. 언니가 사준 거거든. 태현은 숨을 쉴 수 없었다. 본론만 얘기할게. 나는 무슨 짓이든 할거야. 그러니까. 우리 언니를 그리워해서 뭘 한다거나… 주변 사람들 힘들게 하지마. 특히나 가현 언니. 건들지마. 서우의 강직함은 태현을 경직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태현의 그리움도 서우의 말로 무너질 것이 아니었다. 태현은 살짝 화가 났다. 그리워하고 싶은 것은 한참 뒤틀리고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무언이었다. 태현과 서우의 사이에 검은 불꽃이 일어났다. 잿더미로 만들어진 겨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