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위가 낮게 깔린 새벽. 게임회사 Z 문 밖. 아직 햇빛이 숨을 죽이고 이었다. 그 위를 밟고 천천히 걸어오는 한 남자. 가늘게 쭉 뻗은 발목 위 파란색 장미 문신이 작게 자리잡고 있었다. 손에 들고 있는 것도 파란색 장미 다발이었다. 남자에게서는 나무 타는 냄새가 났다. 남자는 회사 건물을 쭉 올려다보다 바닥에 장미를 내려놓았다. 유유히 사라지는 발걸음이 부드럽고 무거웠다. 장미 잎에 햇빛이 드리웠다.
경찰서 안. 서우는 서류를 뒤지며 게임을 만든 관련자들을 찾고 있었다. 옆에는 에너지 음료가 반쯤 구겨진 채 뒹굴었고 먹다 만 컵라면이 서우의 지친 기색을 내비췄다. 서우는 인적사항이 적힌 종이를 보다 처음 보는 사람을 발견했다. 이름 토머스 리. 국적 미국. 게임 캐릭터 및 그래픽 담당. 오싹한 기분이 서우의 등을 짚고 올라왔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노트북 타자 소리가 요란했다. 가현은 소파 위에서 잠들었고 연우만이 게임 시스템을 확인 중이었다. 같이 개발했던 게임 제로는 0부터 시작해 11을 찾는 게임이다. 스테이지 마다 미션을 성공하고 11에 있는 마지막 신 캐릭터를 만나면 답을 찾을 수 있다. 이걸 만든 건 단순한 이유였다. 죽음 끝에 서 있는 사람들이 희망을 찾기 위한 바람으로 만든 것이었다. 연우는 연신 커피를 들이켰다. 따뜻한게 들어가니 몸이 나른해지고 눈이 충혈되기 시작했다. 잠시 안경을 벗고 소파에 기대 있던 중 가현의 핸드폰이 울렸다. 서우였다. 연우는 전화를 받았다. 어 서우야. 나 연우 오빠야. 무슨 일 있어? 전화기 너머에 가픈 숨소리가 들렸다. 테일러 리. 누구야? 서우의 말에 연우는 얼굴이 굳었다. 마치 큰 비밀을 덮고 있던 사람의 표정이었다.
해가 산을 넘어설 때 태현은 회사 문 앞에 놓인 난관을 마주했다. 태현은 뒷걸음질치다 조금씩 앞으로 걸었다. 파란색 장미 다발이었다. 태현의 손에 들린 커피가 쏟아졌다. 짙은 갈색이 장미와 태현의 먼 과거를 적시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