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우는 천천히 총을 내려놨다. 테일러는 놀란 표정으로 서우를 바라봤다. 바닥에 엉망이 된 여인과 닮아 있었다. 머릿속에 사진 한 장이 스쳐 지나갔다.
테일러가 서현을 처음 만난 건 대학생 때였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시작한 미술은 시궁창이었는데, 내쳐진 테일러는 돈을 벌기 위해 미친듯이 돈을 벌었다. 평일에는 수업이 끝나면 햄버거 가게에서 서빙을 했고, 주말에는 거리에 나가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남들을 감동시켜줄 그림을 그리겠다는 다짐보단 목숨을 부여잡는게 일상이 되었을 때, 서현이 찾아왔다.
햄버거 가게 문을 닫고 나온 밖은 냉랭했다. 가을 끝자락을 밟으며 낙엽 소리로 위안을 삼는게 일상이었다. 벤치에 앉아 봉투에 담아온 햄버거를 입에 쑤셔 넣었다. 하루동안 처음 먹는 음식이었다. 순간 울컥했다. 꿈을 꾸는 게 왜 이렇게 힘든지. 나는 왜 누구한테도 기댈 수 없는지. 한참 울고 있을 때 누군가가 테일러의 등을 토닥였다. 서현이었다. 괜찮아요? 그 한 마디에 테일러는 무너져버렸다. 그렇게 처음으로 ‘친구’를 만났다.
서현은 종종 테일러가 일하는 햄버거 가게에 들려 치즈 버거를 먹고 갔다. 서현 역시 미대생이라 둘은 같이 그림을 그리기도 했는데, 테일러는 서현을 만난 후에야 마음을 담은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어떠한 계기가 아닌 자연스러운 변화였다. 점점 생활이 즐거웠다. 일을 끝내고 맥주 한 잔 마시는 일, 스스로를 위해 계란 후라이와 베이컨을 구워 빵에 얹어 먹는 일, 새로 들여온 화분에 물을 주는 일. 상쾌한 공기를 만들어냈다. 귀찮고 힘겹게 먹고 사는 게 아닌 낙원을 하나씩 만들었다. 그래서 같이 꿈을 꾸기 시작했다. 사람들에게 위로를 건네는 그림. 보고 하나의 감정이 북받쳐 올라 울리는 전시회를 만들자고 약속했다. 서현은 가족 사진이 든 팬던트 목걸이를 걸고 다녔다. 사진 안에는 서우와 서현이 나란히 서 있었다. 나는 가족이 동생 밖에 없어.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셨거든. 그래도 괜찮아. 충분히 사랑받았고, 내가 부모님 몫까지 동생 사랑해줄거야. 한국에 혼자 두고 와서 걱정되고… 그래서 한국에 돌아가면 동생이랑 잘 살거야. 가서 취직도 하고 동생이랑 저녁도 먹고. 한국 놀러오면 우리집 놀러와. 같이 먹자. 테일러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행복은 더 큰 불행을 만들어내는 계기처럼 그 꿈은 사라졌다.
테일러는 서우를 향해 다가갔다. 서우의 목에는 피가 물든 반창고가 붙여 있었다. 반창고, 다시 붙여요. 덧난요 그러다. 행복하게 살아야죠. 그래야, 행복해지죠. 서우는 총을 겨눴다. 그 말은 서현이 서우에게 항상 하던 말이었기 때문에. 서우는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냈다. 당신이, 우리 언니 죽였어? 테일러는 마음 속에 깊게 숨겨둔 회색 문을 열었다. 그래, 내가 죽였어. 천둥이 쳤다. 번개는 서우와 테일러의 사이로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