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서늘함이 비추던 새벽. 봄은 오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가게 창문 옆에는 장미를 쥐고 있는 손 그림이 걸려 있었다. 붉은 장미 사이사이에는 푸른빛이 돌았다. 그 위에 세월처럼 차곡차곡 앉아있는 먼지를 닦아내자 봄은 테일러가 떠올랐다. 밤새도록 칵테일을 같이 마시며 웃었던 나날들. 봄은 그때가 그리웠다. 같은 곳에서 같은 고민을 나누고 같은 꿈을 꿨던 사람. 때론 연인보다 사랑했던 사람. 때때로 뜨겁게 타올랐던 청춘의 한 가운데에 가고 싶었다. 창문 밖에 빗방울이 맺혔다. 가만히 바라보던 봄은 문 밖에 closed 팻말을 걸었다.
빗방울이 거세진 새벽 아침. 창문 밖에 매달린 이슬들은 테일러의 등에 스며들었다. 테일러는 젖지 않았지만 빗물에 젖어있었다. 창문에 기대 모든 걸 내려놓은 사람 같이 보였다. 발 아래 엉망이 된 그림이 자신 같았다. 한참을 무너져 있을 때 봄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테일러는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화장실 거울에 김이 서렸다. 뜨거운 공기만 압축되어 있는 욕조 안에 서우가 몸을 담구고 있었다. 오랜 시간 긴장을 한 탓인지 얼어있던 몸을 녹이기엔 시간이 걸리는 듯 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자신을 바라보던 테일러의 눈빛, 말투는 마치 서현을 마주하는 것 같았으니까. 서우는 머리칼 한 올도 남김없이 물속으로 들어갔다.
봄은 근무복을 갈아입고 진리키를 만들기 시작했다. 잔 안에 진, 라임주스를 넣고 길다란 각 얼음을 떨어트렸다. 그 위에 탄산수를 천천히 붓고 라임 슬라이스 하나를 올려두었다. 스푼으로 가볍게 섞어 입안으로 털어넣었다. 그간의 갈증들이 녹아내렸다. 진리키를 반쯤 비울 때 가게 문이 열렸다.
테일러였다. 검은 나시 위에 가죽 자켓을 대충 걸친 모습이었다. 테일러는 반쯤 비어있는 진리키를 전부 마셨다. 탁 소리가 나게 잔을 내려놓고 봄을 바라봤다. 한 잔 더 줘. 봄은 테일러를 걱정스레 바라보다 다시 칵테일을 만들기 시작했다.
진 리키는 진토닉만 먹던 테일러에게 더 단 맛을 주고 싶어 만들어준 술이었다. 처음 먹던 테일러는 신기하다는 듯 한참을 웃었던 기억이 났다. 지금의 테일러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것이었지만. 무슨 일 있어? 봄의 한 마디에 테일러는 한숨을 길게 쉬었다. 그냥…사는 게 여전히 쉽지 않네. 그러는 넌 무슨 일 있어? 봄은 웃으며 말했다. 그냥. 네 그림을 닦는데 네 생각이 나서. 그립더라 옛날이. 가끔 돌아가고 싶어. 테일러는 안주로 놓아진 초콜릿을 하나 집어 씹어먹었다. 나도. 그래서 왔어. 후회해 늘. 왜 그때 난 나약해서 아무것도 막지 못했을까. 테일러는 슬픔과 공허함이 공존했다. 그 공간 사이를 뚫어줄 바늘이 필요했다. 봄은 턱을 손으로 괸 채로 칵테일 잔을 두드렸다. 어렵다. 근데 네 잘못이 아니야. 네가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난 좋아. 그게 어떤 대가가 있었다 해도. 봄의 눈이 반짝였다. 그 빛의 깊이는 감히 바닥을 찾을 수 없었다. 잔 안에서 하염없이 형체를 잃어가는 얼음이 둘 사이의 시간을 가리켰다. 덧없고 의미가 꽉 찬 봄의 영원한 낮 안의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