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을 가로지른 위에 봄이 서 있었다. 바 앞에는 태현이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해 위스키를 들이켰다. 봄은 잠시 고민하다가 잔 안에 얼음을 가득 채워 넣었다. 투명했던 잔은 안개가 끼면서 시야를 흐리게 만들었다. 봄은 수건으로 잔의 물기를 닦아내고 잔 주변에 레몬을 부드럽게 쓸어 내렸다. 태현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봄을 바라봤다. 예상이라도 했듯 봄은 태현의 위스키 잔을 옆으로 밀어냈다. 레몬즙을 먹은 잔 위에 설탕을 묻혔다. 레몬즙에 달라붙은 잔 표면이 반짝거렸다. 태현은 홀린 듯 잔 위에 손을 가져갔다. 핑크 다이아몬드의 전설 같았다, 욕심이 드글거리는 이가 가지면 비극을 맞이하는 걸 알면서도 거부할 수 없는 단내였다. 봄은 쉐이커에 얼음을 넣고 보드카, 슬로 진, 드라이 버무스를 얼음 안에 가뒀다. 자두 향이 짙게 났다. 미리 착즙해둔 레몬즙을 넣고 쉐이커를 흔들었다. 얼음 부딪히는 소리가 거칠고 상쾌했다. 쉐이커를 열어 설탕 묻은 잔 안에 쏟아 내렸다. 그리고 태현 앞에 내려놓았다.
키스 오브 파이어. 용기와 모험을 뜻하지. 지금 너한테 딱 어울리는 것 같다. 태현은 붉은 빛에 홀린듯 잔 밑부터 위까지 훑어보다 잔에 입을 가져갔다. 혀끝에 녹아내리는 설탕의 입자와 타오르는 맛에 마음 속 불씨가 완전히 깨어난 기분이었다. 나도 이제 깨고 나와야지. 쉽지 않은 일이니까 더더욱 해야겠지. 봄은 태현은 똑바로 쳐다보곤 확신에 찬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어. 해야지. 널 위해서.
우주 속에 내버려진 가현. 그 안에 기대 울고 있었다. 손가락 까딱할 힘도 없이 무너져 내렸다. 소중한 이를 잃은 기분이 얼마나 참담한지. 어쩌면 이 터널은 계속된게 아닐까. 알면서도 모른 척 했던 거겠지. 그래, 가현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이렇게 늪에 빠져 있는 것 말고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들을 말이다. 서우를 어떤 얼굴로 마주해야 할지 이 생을 끝낸 후에 서현에게 뭐라 해야 할지… 그럼에도 서현은 아무것도 묻지 않겠지만. 손목에 족쇄처럼 묶여있는 롤렉스 시계가 무색하게 힘을 다해가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봄에게 전화가 왔다. 어둠의 파편들 속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것이었다, 가현은 전화를 받았다.
태현이 잔을 다 비우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회의감이 들었을까. 자신이 짓는 표정이 뭔지 알까.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새벽이 아침에 잠들었다. 해가 뜨기 시작할 때, 가현이 바 안으로 들어왔다. 봄과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앉으려던 찰나 태현과 눈이 마주쳤다. 가현은 크게 한숨을 쉬었다. 너는 서울에 바가 여기 뿐이냐. 아니면 뭐 또 하시게? 날카로운 말이 태현의 볼을 스쳤다. 태현 역시 골치가 아픈 듯 받아 쳤다. 너야말로 여긴 왜. 너한테는 안 좋은 공간 아닌가. 비수가 공기가 될 때 봄은 태현의 어깨를 토닥이며 같이 밖으로 나갔다. 가현은 알 수 있었다. 둘 사이에 지독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그렇게 아침은 해가 번지지 못한 채 낮을 잃어갔다.
찬 공기가 목덜미를 감싸자 태현은 꿈에서 깬 표정을 지었다. 봄은 태현의 겉옷을 챙겨주며 작게 물었다. 너, 가현씨 알아? 태현은 굳은살 같은 존재라고 말하곤 영원한 밤을 떠났다. 그 말에 봄은 마음 한 쪽에 종이에 베인듯 따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