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회사 Z앞. 기자들이 플래시를 터트리며 태현을 에워쌌다. “지 대표님. 이번 게임 X의 디자이너가 자살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살해라는 의혹도 있는데 대답 좀 해주시죠! 고인의 최소한의 예의도 없는 건가요?” 순간 태현의 발걸음이 멈췄다. 태현은 죽일듯한 눈빛으로 기자 앞으로 다가갔다. 기자는 태현의 눈빛을 읽기라도 한 듯 한껏 긴장한 것 같았다. 태현의 숨소리가 가까워질 때 누군가 기자 손에 들린 핸드폰을 집어 던졌다. 핸드폰 액정이 깨지고, 파편이 바닥에 흩뿌려졌다. 주워담을 수 없는 말처럼 핸드폰의 불빛은 꺼졌다. 잠시 조용하다 태현의 뒤에서 플래시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태현은 탄식하듯 가현의 이름을 불렀다. 김가현… 그래, 가현이었다. 언제나 태현이 흔들릴 때 잡던 건 가현이었다. 사실 태현은 알고 있음에도 부정하고 싶었다. 자신의 욕심 하나로 소중한 사람들의 백야를 버렸으니. 가현은 태현 앞으로 겁없이 걸어갔다. 잃을 것 없는 표정은 모든 걸 다 사라지게 만들 것 같았다. 가현의 눈에 담긴 건 원망. 그 이상을 넘어선 분노였다. 그 분노가 어디까지 차오를지는 감히 알 수 없었다. 태현의 눈빛은 파도가 치기 시작했다. 가현은 기자들을 밀치고 회사 안으로 들어갔다.
컴퓨터 안에 살던 서현의 그림이 하나씩 무너졌다. 수 십대가 즐비한 컴퓨터 전부가 꺼져버렸다. 전원을 뽑는 가현의 손은 거침 없었고, 벽에 붙여둔 우주 그림도 살이 찢겨나갔다. 가현은 넋이 나간 직원들 앞에 서서 말했다. 이 시간 부로 게임 X는 없습니다. 결국 이게 끝입니다. 직원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흥분된 가현의 어깨로 다정한 손이 올라왔다. 아끼는 장난감을 잃은 아이를 달래듯 다정했다. 가현의 눈동자 안으로 연우가 들어왔다. 연우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직원들을 마주했다. 작가님 말대로 이제 게임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아직 해결해야 하는 것들이 많지만 지금 이 순간부터는 어떤 게임 서비스도 제공되지 않습니다. 오늘은 다들 일찍 가보세요. 추후에 조치 내리겠습니다. 싸늘한 연우의 말에 직원들은 하나 둘 사무실 안에서 사라졌다. 모든 소음이 사라졌을 때 둘은 제 자리를 찾아냈다.
대표실 안에는 태현의 아버지인 이관장이 앉아 있었다. 복숭아 모양을 한 화과자를 한 입 베어 물며 소청감을 우려내고 있었다. 검붉은 차 색이 아주 조용한 강물처럼 고요했다. 태현은 코를 스치는 청귤 향이 역겨운지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헛구역질은 목에 생선 가시처럼 단단히 박혀 나올 생각이 없었다. 화과자를 먹던 이관장은 태현을 올려다봤다. 표독하고 욕망이 드글거리는 얼굴을 드러냈다. 화과자 안에 꽉 차 있는 앙금이 제 껍데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삐져나왔다. 이관장은 반쯤 먹던 화과자를 접시에 내려놓고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원래 복숭아라는 게 신선들이 먹던 거라고. 아주 귀한 거란 말이야. 근데 넌 이 모양도 내질 못하니 쯧. 대체 널 어디에 써먹어야 하냐고. 이관장은 몸을 일으키더니 통창 앞에 서서 밖을 내려다봤다. 지대표. 우리 같은 사람은 말이야 이렇게 내려볼 수밖에 없는 운명인거야. 이관장은 태현의 책상 위에 있던 건축 모형에 눈을 돌렸다. 건축 모형은 우주를 배경 위 온통 보라색인 사람 모형 하나가 서 있었다. 이관장은 눈쌀을 찌푸렸다. 자신이 가질 수 없는 무언가는 없다고 생각하겠지. 그 길을 가현이 단단히 막고 있으니 심기가 불편했다. 질겨. 아주 징글징글해. 태현은 뭘 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그 안에서 끈적이고 작은 불씨가 꿈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