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 정치, 어떻게 볼 것인가?-
“유럽과 논의하려면 누구에게 전화를 해야 하나?”
1970년대 미국의 국무장관이었던 헨리 키신저가 한 말이다. 20세기 가장 유명한 외교관으로 불리는 키신저의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국제정치의 공간 혹은 외교현장에서 유럽(지금은 유럽연합)이라고 하는 상대가 얼마나 독특한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시다. 예를 들어 미국의 대통령 또는 국무장관이 한국과 주요 사안에 대해 긴밀하게 논의를 해야 할 경우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상대는 한국의 대통령일 것이다. 그러나 197-80년 당시 미국 국무장관의 입장에서 유럽과 관련된 사안을 논의하기 위해서 프랑스 대통령 또는 독일 총리와 같은 주요 국가의 수장에게 전화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유럽공동체 기구의 고위관료에게 연락을 해야 하는 것인지 분간하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특히, 정치·군사와 같은 복잡하고 어려운 사안일수록 더욱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만약 지금 키신저가 살아있다면, 유럽과 논의하기 위해 전화할 상대를 고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적어도 앞으로 5년 간 폰 데어 라이엔(Ursula von der Leyen)에게 전화하면 되기 때문이다. 지난 18일, 그녀는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 위치한 유럽의회에서 유럽연합 집행위원장(European Commission President) 연임에 성공했다. 무기명 방식(secret ballot)으로 진행된 투표에서 그녀는 총 719명의 유럽의회 의원들 가운데 401명에게 선택을 받았다. 이번 투표에서 가결요건은 과반인 360표였는데, 그녀는 41명의 선택을 더 받은 셈이다. 지난 2019년 당시 9표 차이로 가까스로 집행위원장에 선출된 것을 감안하면 그녀의 정치력이 어느 정도 입증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국내의 다수 언론들은 이번 연임을 보도하면서 그녀가 ‘여성’이라는 다소 비본질적인 부분에 집중하는 행태를 보였다. 예를 들어, 그녀가 의사 출신이자 7남매를 둔 ‘만능 워킹맘’이라거나, 2013년 독일의 첫 ‘여성 국방장관’으로 지명되었다거나, 또는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66년 역사에서 연임에 성공한 첫 여성이라는 점 등이다. 물론 이 같은 부분들이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클 뿐만 아니라 뉴스를 접하는 독자의 관심을 끌만한 내용이다. 그러나 보다 본질적으로 유럽연합은 무엇이며, 유럽정치의 구조가 어떠하며, 그 구조 하에서 그녀의 이번 연임이 향후 유럽정치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를 살펴보는 것이 더욱 중요할 것이다.
1952년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에서 시작되어 지금도 변하고 있는 유럽연합(EU)은 정치학인 낳은 상상력의 산물이다. 많은 시민들이 언론을 통해 유럽연합을 쉽게 접하면서 유럽연합이 우리에게 익숙한 국가(state)처럼 예전부터 있었고, 예전의 모습이 지금과 비슷한 형태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가 부르는 유럽연합은 불과 30년 전인 1992년 마스트리흐트 조약을 통해 시작되었으며, 우리가 유럽여행을 위해 시중은행에서 환전하는 유로화는 불과 20년 전인 2002년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급격한 변화를 고려하면, 향후 10년 후 유럽연합의 모습은 어떻게 변할지 예측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같은 유럽연합을 보다 현실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발칙한 상상력을 동원해 보자. 2000년대 초반, 서로 전쟁을 경험했던 동아시아 6개 국가들(한국, 북한, 일본, 중국, 대만, 필리핀)이 평화와 협력을 위해 아시아연합(Asian Union)을 만들었다고 상상해 보는 것이다. 당시 6개국의 정상들이 한 자리에 모여 아시아연합을 출범시키기로 합의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장쩌민 중국의 주석과 고이즈미 일본 총리 사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을 어렵게 설득해 이 합의를 성사시킨 것이다. 그러면서 동아시아에서 중요한 안보 이슈를 공유하고 있는 북한, 대만, 필리핀을 이 연합에 동참하게 한 것이다. (실제 1950년대 초반 유럽통합의 시초는 프랑스 정치인이었던 장 모네의 계획에서 출발하였으며, 이후 프랑스 외무장관이었던 슈만이 1952년 유럽석탄철강공동체 설립 제안을 한다. 그리고 초기 회원국은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그리고 베네룩스 3국인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다.)
이렇게 출범한 아시아연합은 여러 위기도 있었지만, 와해보다는 지속적인 확대와 심화의 길로 나아갔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서 아시아연합은 점차 통합에 중요한 역할을 한 김대중과 같은 정치지도자 개인보다 연합 내부의 다양한 제도를 공고히 하는 방향으로 발전을 거듭했다. 특히, 외교현장에서 중요한 현안에 아시아연합의 누구와 논의를 해야 할지 모호하다는 비판을 수용해 아시아연합은 개별 국가의 이익보다는 아시아연합의 통합을 고려한 집행위원회의 권한을 점차 강화하고, 이 기구를 이끌어갈 집행위원장을 선출한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국제사회에서 아시아연합의 영향력을 고려해 G7, G20 정상회의와 같은 외교무대에 아시아연합 집행위원장이 참석하기에 이른 것이다.
간략하게 서술한 이 상상은 지나치게 터무니없게 느껴진다. 그러나 이 상상은 유럽통합,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의 실제 역사다. 그리고 현재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27개 개별 회원국의 이익과 별개로 유럽연합 전체를 대변하는 독립된 조직이다. 이를 위해 집행위원회는 정책 이행, 예산 관리·집행 등과 같은 일반 국가의 행정부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이에 몇몇 언론들은 이번에 연임된 폰 데어 라이엔을 ‘유럽 대통령’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실제 폰 데어 라이엔은 G7, G20 정상회의는 물론 NATO 정상회의에도 유럽을 대표해 참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유럽정치는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우선,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상대(유럽연합)를 ‘있는 그대로’ 볼 필요가 있다. 국제정치학에서 유럽연합은 국가도 아니고, 그렇다고 우리에게 익숙한 유엔(UN)과 같은 국제기구도 아니다. 유럽연합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새로운 정치적 실험’이며, 냉전시대의 국가중심적 사고로는 이해하기 힘든 탈냉전적 정치체(polity)이다. 이에 이안 마너(Ian Manners)와 같은 학자는 이 같은 유럽연합만의 독특한 역사적 맥락과 하이브리드 정치적 구조(hybrid political system)를 강조하며, 유럽연합을 국제사회에서 이전에 없던 ‘새로운 형태의 행위자’(a novel kind of actor)라고 정의하기도 했다. 여전히 남과 북이 여전히 군사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한반도에서, 여전히 세상을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이라는 이분법으로 인식하는 한국의 정치지형에서 국가도 아닌, 그렇다고 국제기구도 아닌 이 탈냉전적 유럽연합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유럽정치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이에 대해 두 가지 핵심적인 이론적 논의가 있다. 하나는 모라브칙(Moravcsik)의 ‘정부간주의’ 관점이며, 다른 하나는 하스(Haas)의 ‘초국가주의’ 관점이다. 전자는 유럽통합은 물론 유럽연합 내에서의 정치는 프랑스, 독일과 같은 개별 회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과정에서 야기되는 협상의 결과물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신기능주의 이론으로 불리는 후자는 초기 통합의 동기가 개별 국가의 이익일 수는 있지만, 실제 통합의 과정은 합의하기 쉬운 분야의 협력이 타 분야의 협력으로 전이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에 전자인 정부간주의 관점에서 유럽정치는 결국 국가들의 협상장에 불과하다고 보는 반면, 후자인 초국가주의 관점에서 유럽정치는 통합이 가속화되면서 국가가 가지고 있던 권한들이 국가 상위의 초국가기구로 이양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정부간주의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유럽연합 기구는 개별 회원국 정상들이 모이는 유럽이사회(European Council)인 반면, 초국가주의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유럽연합 기구는 기술관료로 구성된 유럽 집행위원회(European Commission)다. 이번에 연임이 된 폰 데어 라이엔의 직함이 바로 이 집행위원회의 수장이다.
너무 딱딱한 이론 이야기를 했다. 그렇다면 실제 이러한 유럽정치의 특징과 이번 폰 데어 라이엔의 연임을 고려할 때, 앞으로 유럽은 어떻게 될 것인가? 크게 2가지를 예상할 수 있다. 첫째, 극우적 성향의 개별 회원국 수장과 유럽연합 기구 수장 사이의 갈등이 심화될 것이다. 즉, 개별 회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국가와 유럽 통합을 가속화하려는 유럽연합(초국가) 사이의 줄다리기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이론적으로는 정부간주의 와 초국가주의의 대결로도 볼 수 있는데, 최근 유럽에서 급부상하고 있는 극우 정당의 영향력으로 인해 오히려 이 같은 대결 양상은 과거보다 더 극단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 지난 5일 헝가리의 빅터 오르반 총리가 러시아 푸틴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러시아를 공식 방문하면서 갈등이 수면 위로 급부상했다. 최근 오르반 총리는 평화 임무’라며 중국과 러시아를 잇달아 방문하며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와 마찰을 빚고 있는데, 특히 오르반 총리는 단순히 유럽연합 회원국 수반일 뿐만 아니라 오는 7월 1일부터 12월까지 6개월간 유럽이사회(Council of the EU) 의장이기 때문에 중요한 이슈로 대두되고 있다. 이에 유럽 집행위원회는 물론 유럽의회는 이 같은 오르반 총리의 행보에 대해 전혀 협의된 바 없다고 밝혔으며, 폰 데어 라이엔 집행위원장은 향후 오르반 총리가 의장직을 맡는 동안 주요 회의에 불참하는 보이콧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둘째, 연임에 성공한 폰 데어 라이엔은 유럽통합주의자들이 강조했던 ‘정치와 안보’ 분야 통합을 위한 제도적 발전에 관심을 둘 것으로 보인다. 앞서 기술했던 유럽통합을 강조하는 초국가주의자들은 비교적 합의가 쉬운 경제적 분야의 협력을 기반으로 궁극적으로 정치와 안보 분야의 통합을 추구했다. 이런 관점에서 유럽통합주의자인 폰 데어 라이엔은 1기(2019-2024)에 미미했던 정치와 안보 분야 통합을 위한 제도 개선에 관심을 기울일 것으로 보인다. 실제 BBC 보도에 따르면, 폰 데어 라이엔은 미국에서 트럼프 재선의 가능성이 높아지자 유럽이 점차 군사·안보적으로 미국 의존성(dependencies)을 줄여야 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또한, 이번 연임 과정에서 극우 정당으로 분류되는 이탈리아 조지 멜로니와 확실하게 선을 그은 것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지난 6월 유럽의회 선거에서 극우정당들이 약진하며 많은 전문가들은 폰 데어 라이엔이 연임을 위해 불가피하게 멜로니와 손을 잡을 것으로 보았다. 그 이유는 지난 6월 유럽의회 선거에서 이탈리아 조지 멜로니가 소속된 유럽보수와 개혁(ECR) 정당이 유럽의회에서 4번째로 많은 의석수를 보유한 정당이 된 것은 물론, 알 자지라 보도에 따르면 실제 폰 데어 라이엔은 이와 관련해 조지 멜로니 측과 지속적인 대화를 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지난 6월 신임 집행위원장 후보를 선출(nomination)하는 과정에서 유럽보수와 개혁(ECR)이 제외되자 조지 멜로니는 폰 데어 라이엔 지명 투표에 기권했다. 이후 폰 데어 라이엔은 BBC와의 인터뷰에서 앞으로 ‘민주주의 세력과 연대’하겠다며 우회적으로 조지 멜로니와의 동행을 공개적으로 거부했다. 이러한 기류를 통해 볼 때, 당분간 폰 데어 라이엔 집행위원장은 극우 정당의 협상보다 친유럽주의를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정리하면, 사회학적 상상력이 낳은 유럽연합이라는 정치체는 지난 70여 년 간 발전을 거듭했다. 이에 과거 유럽과 논의하려면 누구에게 전화해야 할지 난감했지만, 이제는 ‘적어도’ 향후 5년간은 폰 데어 라이엔에게 연락하면 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에게 유럽연합은 전략적 동반자관계일 뿐만 아니라 2011년 FTA 이후 중요한 교역 파트너다. 그렇다면, 우리가 원하는 대로 유럽연합을 볼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유럽연합을 보고, 유럽정치의 작동원리를 제대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유럽연합과의 외교에서 우리의 국익을 극대화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