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변하고 있는 외교의 흐름-
‘세계는 변하고 있다’
이 말은 ‘밥을 먹으면 배부르다’만큼이나 진부한 클리셰(cliché, 진부하거나 틀에 박힌 생각 따위를 이르는 프랑스어)다. 국제정치학을 전공한 필자에게 너무도 진부해 보이는 이 표현이 지금의 국제정세를 가장 잘 대변해 주는 듯하다.
‘국제정치학’(International Relations)이 대학에서 체계적인 학문으로 자리 잡은 것은 생각보다 길지 않다. 국제정치학은 불과 100여 년 전 영국 웨일스에 위치한 ‘Aberystwyth University’ 대학에서 시작되었다. 지난 100여 년의 국제정치를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20세기 전반은 유럽에서 발발한 두 차례의 전쟁으로 요약된다. 이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국제정치의 중심은 유럽에서 미국과 소련으로 옮겨간다. 이후 약 45년 간 세계는 미국과 소련(자유주의와 공산주의) 중심의 두 진영으로 나뉜다. 이 두 시기 가운데 그 국제정치에서 그 무엇보다 중요한 행위자는 바로 ‘국가’(State)였다.
영원히 지속될 것 같던 냉전은 갑작스럽게 사라진다. 1991년 소련의 붕괴와 함께 막을 내린 냉전, 이에 대해 일본의 정치학자 후쿠야마(F. Fukuyama)는 ‘역사의 종언’이라는 평가까지 내린다. 근본적인 질적 변화를 동반한 탈냉전 시기가 도래하자 국가 간 관계에서 경제적 상호의존은 이념보다 중요한 변수로 자리 잡는다. 노태우 정부가 1990년 러시아, 1992년 중국과 이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외교관계를 수립했던 북방정책도 이 같은 국제정치 변화의 산물이었다.
이에 20세기 후반부터 경제적 상호의존을 매개로 국가를 뛰어넘어 다양한 형태의 지역주의(지역통합)가 가속화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유럽연합(EU)이다. 즉, 전통적인 국가의 경계를 뛰어넘는 초국가기구의 가능성이 구체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와중에 미국에서 2001년 9.11 테러가 발생한다. 이후 국제정치는 테러와의 전쟁으로 변모해 버린다. 즉, 탈냉전 이후 국제정치에서 불과 약 20년 사이에 유럽연합과 테러집단과 같이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형태의 비국가 행위자들이 등장한 것이다.
그렇게 국제정치에서 국가의 중요성이 감소하고, 다양한 형태의 비국가 행위자가 그 자리를 메꾸는 사이에 중국은 급속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소련이 붕괴하고 약 20년 간 국제정치는 미국의 일극체제였다. 그런데 2010년대 들어 ‘자신의 재능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인내하면서 때를 기다리던’(도광양회) 중국이 미국을 대적할 국가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 반증이 바로 오바마 행정부가 대외정책 기조를 아시아로 선회하기 시작한 ‘Pivot to Asia’다. 이와 함께 2010년대 중·후반부터는 유럽을 중심으로 ‘극우 정당’이 득세하기 시작한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바로 ‘국가’다. 그것도 민족주의에 기반한 강력한 국가.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 프랑스의 르펜, 헝가리의 오르반, 네덜란드의 빌더르스, 그리고 이탈리아의 멜로니 총리다.
간략하게 지난 100년 간의 국제정치를 살펴보았으나, 최근 나타나는 특징은 크게 2가지다. 하나는 국제정치의 질적 변화 주기가 매우 짧아졌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다시금 국가주의로 회귀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후자의 경우, 외교의 형태가 위에서 언급한 다양한 비국가 행위자와의 외교에서 다시금 개별 국가와의 양자외교가 중요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개별적인 국가는 과거 이념적으로 가깝지 않던 국가들 사이에서 더욱 활발하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지난 7월 말 시진핑과 멜로니의 만남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난 27일, 이탈리아 멜로니 총리는 중국을 공식 방문했다. 이는 지난 2022년 10월 취임한 멜로니 총리의 첫 중국 방문이다. 이에 많은 외신들과 전문가들이 이 행보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는 특히 멜로니가 총리로 취임하면서 2019년 주세페 콘테 총리가 중국의 일대일로(One belt, One road) 계획에 참여하기로 한 것을 두고 ‘엄청난 실수’라고 비판했기 때문이다. 급기야 2023년 12월 3일, 총리가 된 멜로니는 중국의 일대일로 구상에서 탈퇴하기로 공식 발표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번 멜로니 총리의 방중을 두고 여러 분석이 난무하고 있다.
보도들을 종합해 보면, 이번 중국-이탈리아 정상회담의 핵심 의제는 경제 관련 내용으로 보인다. 지난 28일, 멜로니 총리는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리창 중국 국무원 총리를 만나 '3개년 행동계획'을 체결했다. 이 계획의 골자는 두 국가의 경제분야 협력으로 전기차, 조선, 인공지능, 항공·우주 등의 분야 협력을 담고 있다. 이튿날 29일, 멜로니 총리와 시진핑 주석이 베이징 댜오위타이 국빈관에서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는 전날보다 광범위한 주제들이 논의되었다. 이탈리아 총리실에 따르면, 두 정상은 인도·태평양 지역의 안보 현안부터 우크라이나 전쟁과 중동 위기까지 광범위한 글로벌 의제들에 대해 논의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이번 정상회담을 두고 두 국가의 의도, 즉 국가이익은 무엇이었을까? 먼저, 중국은 자국의 일대일로 구상에서 탈퇴한 이탈리아를 재가입시키는 것이다. 2013년 중앙아시아와 동남아시아를 순방하면서 발표한 이 계획은 여전히 중국의 최우선 대외전략일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는 서유럽 국가 가운데 유일하게 이 구상에 가입했던 나라다. 아래 지도에서 알 수 있듯이, 이탈리아는 해상 실크로드에서 중국이 유럽으로 가는데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다. 이에 시진핑 주석은 29일 멜로니 총리와의 회담에서 중국과 이탈리아가 실크로드 정신을 계승해야 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다음으로 이탈리아는 경제적 의도가 분명하다. 멜로니 총리는 시진핑 주석에게 양국의 투자 및 무역 불균형 해소를 요구했다. 그 이유는 이탈리아는 지난 2019년 이후 지속적으로 대중 무역에서 적자가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2019년 약 140억 달러이던 무역 적자는 2022년에는 329억 달러까지 증가했다. 중국의 일대일로 계획에 참여하면 경제적 이득이 클 것으로 예상했던 이탈리아로서는 예상치 못한 이 같은 경제적 문제를 이번 회담을 통해 해소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멜로니 총리는 이번 방중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극대화하는 카드로 활용할 개연성이 크다. 최근 BBB 보도는 유럽연합이 유럽 내 전기차 시장에서 중국 정부의 보조금을 받는 중국산 전기차에 대해 37.6% 추가 관세를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유럽연합과 중국이 갈등이 격화되는 시점에서 멜로니 총리가 나서서 둘 사이의 조정자 역할을 자처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지난 6월 유럽의회 선거에서 급부상한 멜로니 총리는 이번 유럽연합 집행위원장 선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했으나, 폰 데어 라이엔 위원장이 멜로니 대신 녹색당을 선택하면서 사실상 배제되었다. 이에 멜로니 총리는 이번 방중을 향후 유럽연합 정치에서 적극 활용할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번 중국과 이탈리아의 정상회담은 노골적으로 개별국가의 정치·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외교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유럽연합이 중국과의 전면적인 교역갈등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유럽연합의 주요 회원국인 이탈리아가 중국과 정상회담을 가진 것은 의미가 남다르다.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탈냉전 이후 국제정치는 이념보다 경제적 상호의존이 중요해졌다. 이에 국가 중심의 양자외교(bilateral diplomacy)에서 다양한 국제 및 지역기구에서 ‘셋 이상의 국가들이 동시에 서로를 상대하여 특정 의제에 대한 이해조정과 협력방안을 찾아가는’ 다자외교(multilateral diplomacy)가 점차 중요해졌다. 구체적으로, 지난 2004년 반기문 당시 외교부 장관은 경향신문에 기고하면서 “이념이 배제된 채 세계화와 지역화가 동시에 진행되는 새로운 역사가 전개되고 있다”며 ‘다자간 정상외교’가 중요해지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유럽연합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유럽연합은 소련이 붕괴하고 1992년 마스트리히조약을 체결하면서 이전의 경제공동체에서 내무·사법 분야와 대외정책을 추가하며 질적으로 통합을 심화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유럽연합은 과거 공산권이던 동유럽으로 양적으로 통합을 확대했다. 1995년 3개국(스웨덴, 핀란드, 오스트리아)이 가입했고, 2004년에는 무려 10개국(폴란드, 헝가리, 라트비아, 슬로바키아, 리투아니아, 체코, 에스토니아, 슬로베니아, 사이프러스, 몰타)이 가입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2007년 루마니아, 불가리아가, 2013년에는 크로아티아가 가입을 하며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유럽연합이 되었다. 이 확대 과정에서 알 수 있듯이, 과거 공산주의 진영에 속하던 국가들이 자유주의 진영의 선봉이라고 할 수 있는 유럽연합에 가입한 것이다. 이는 개별 국가의 외교에서 이념보다 경제적 상호의존이 중요한 기준이 되었으며, 개별 국가의 양자외교보다 셋 이상의 국가들이 동시에 벌이는 다자외교가 국제정치에서 중요해졌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그러나 위의 중국-이탈리아 정상회담에서 살펴봤듯이, 이 같은 기류에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즉, 규범과 제도화된 지역기구에서의 다자외교보다는 양자외교로의 회귀가 바로 그것이다. 냉전 시기에는 미국과 소련 중 하나를 선택하는 외교였고, 탈냉전 이후 약 2-30년은 이념을 떠나 다양한 국제 및 지역기구에 가입해 다자외교의 틀 속에서 국가 이익을 도모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특정 지역기구에 속하면서도 자국의 정치·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양자외교를 우선시하는 경향이 보이는 것이다. 지난 7월부터 오는 6개월간 유럽연합 순회의장국(Council of the EU presidency)을 맡은 헝가리의 오르반 총리의 최근 행보 또한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는 의장이 되자마자 지난 5일 현재 유럽연합과 외교적으로 심각한 대립을 하고 있는 러시아를 전격 방문하더니, 8일에는 중국까지 방문했다.
이탈리아의 멜로니 총리와 헝가리의 오르반 총리의 공통점은 두 정상 모두 유럽연합이라는 지역기구의 회원국 수장이면서 동시에 극우적 정치성향을 지닌 지도자라는 점이다. 덧붙여, 지난 브렉시트 이후 유럽 내에서 급속하게 급부상하고 있는 극우 정당들을 고려하면, 향후 이 같은 양자외교의 움직임은 더욱 두드러질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런 변화하는 국제정치와 외교의 현실 속에서 현재 한국의 외교는 어떠한가? 지난 2년간 한국 외교는 철저하게 1970년대의 데탕트도 아닌 1980년대 냉전 시기로 회귀했다. 시대를 역행하고 있는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입으로 ‘자유’만을 외치고 있으며, 과거 공산주의 이력을 가지고 있는 국가들과의 외교는 모조리 담을 쌓고 있다. 그러면서, 단순히 자유주의 진영에 속하면 외교가 끝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3년 연속 나토 정상회의에 참석하고 있는 것이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3년 연속 나토 정상회의에 참석한 것은 윤석열 대통령이 유일하다.
결론적으로 단순한 다자외교보다 다양한 국제 및 지역기구에 속해 있으면서도 각각의 개별 국가와 양자외교를 펼쳐야 하는 지금은 냉전 시기의 외교보다, 탈냉전 후 2-30년의 외교보다 훨씬 복잡한 고차방정식이 되었다. 다시 말해, 내가 속한 다자외교의 규범과 제도를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 그 다자외교에 속한 국가뿐만 아니라 그 다자외교에 속하지 않은 다른 국가와도 양자외교를 펼치려면 그 어느 때보다 섬세한 외교가 필요하다. 그러나 지난 2년 동안의 윤석열 정부의 외교 실력은 보면 이것을 기대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