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현, '밤기차를 타고'
-안도현
산모퉁이를 돌면서 기차는
쓴 약 같은 기적소리로 울고 있었다
유리창에 눈발이 잠깐 비치는가 했더니
이내 눈송이와 어둠이 엎치락뒤치락
서로 껴안고 나뒹굴며 싸우는 폭설이었다
잠들지 않은 것은
나와 기차뿐
철가 옆 낮은 처마 아래 불빛 하나뿐
저기 잠 못 든 이가 처녀라면
기적소리가 멀어지면 더욱 쓸쓸해서
밤새도록 불을 끄지 못할 것이다
화자는 지금 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습니다. 기차는 간헐적으로 기적소리를 토해내며 달립니다. 기적소리는 ‘쓴 약’과 같은 울음으로 들립니다. 기적소리는 꿈을 싣고 달리는 낭만의 표상인데 왜 쓴 약과 같다고 했겠는지요? 안도현 시인은 ‘기차’라는 시에서 ‘단 한 번도 탈선해 보지 못했으므로 저렇게 서서 운다’고 말합니다. 목적지에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어서 ‘약’이 될 수 있지만, 잠시 쉬어 바깥 풍경을 볼 수도 없고, 더 빠르게 달려볼 수도 없기에 ‘쓸’ 수밖에 없습니다. 정해진 길로 정해진 시간에 맞추어 달려야 하는 숙명, 그것이 ‘쓴 약’ 같은 울음을 토하게 하는 것이겠지요.
밖에는 거센 눈보라가 몰아칩니다. 그래도 기차는 정해진 속도로 정해진 길을 따라 달립니다. 바깥 풍경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풍경일 뿐입니다. 내 의식을 깨우고 내 정서를 자극하는 무엇이 아니라 그저 잠들어 있는 대상일 뿐입니다. 그 풍경은 내가 보든지 보지 않든지, 내가 그 현장에 있든지 있지 않든지, 그 모습 그대로 거기에 있을 뿐입니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풍경과 사건이 있겠습니까? 나와는 아무 상관 없이, 그저 존재하는 풍경이고 사건일 뿐입니다. 그러니 ‘잠들지 않은 것은 나와 기차뿐’이겠지요.
그러나 여기 잠들지 않은 사람이 또 하나 있습니다. ‘쓴 약 같은 기적소리’에 자신의 삶을 싣고, 자신의 꿈을 싣고 달리고 싶은 사람이지요. 자신의 꿈을 싣기도 전에,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기도 전에 기적소리가 사라집니다. 그러면 ‘더욱 쓸쓸해서 밤새도록 불을 끄지 못할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나 이외의 대상도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잠들지 않고 깨어있는 대상일 수 있습니다. 모두들 자기 나름의 삶이 있고, 꿈이 있고 삶의 일부로서 쓸쓸함이 있습니다. 기적소리에 자신의 꿈을 싣고 달리는 사람도 있고, 기적소리에 외로움을 달래는 사람도 있습니다. 기차를 타고 빠르게 지나치면 그런 소중한 삶의 모습을 볼 수도 없고, 밤새도록 불을 끄지 못하는 ‘처녀’의 마음을 헤아릴 수도 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잠들지 않은 것은 나와 기차와 처녀’만이 아닙니다. ‘눈송이’와 ‘어둠’이 ‘서로 껴안고 나뒹굴며 싸우는 폭설’도 잠들지 않고 있습니다. 나를 주체로 보면 나 이외의 것은 모두 잠들어 있는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잠든 그 대상을 주체로 보면 ‘나’가 잠든 대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어떤 생각을 가지느냐에 따라 나 이외의 대상은 그저 잠든 대상으로 보일 수도 있고, 잠든 나를 깨우는 대상으로 보일 수도 있지 않겠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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