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림, '파장(罷場)
파장(罷場)
-신경림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켜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 빚 얘기
약장수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싯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 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화자는 농민의 일원으로, 시골 장날 장보러 갑니다. 5일마다 서는 장은 생필품을 팔기도 하고 사기도 하는 날이지만, 시골 사람들에게 지난 5일간의 답답함을 풀어내는 날이기도 합니다. 같은 처지에 있는 다른 마을 사람들도 5일만에 만납니다. 팔기 위해 가져온 참외를 깎아 나눠 먹으며 서로 얼굴만 봐도 친구를 만난 듯 흥겨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가뭄 이야기와 밀린 조합 빚 이야기가 나오면서 흥겨움은 근심으로 바뀝니다. 농촌에 살아봐야 희망이 없다는 절망감이 엄습해 옵니다.
서울이 그리워집니다. 하나 둘 고향을 떠나 서울로 간 친구들이 그리워집니다. 친구 찾아 서울로 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서울에 가기 위해서는 상당한 돈이 필요합니다. 산동네라도 당장 살 거처를 마련하기 위한 돈이 없습니다. 노름을 해서라도 큰돈을 손에 쥐어야 서울에 갈 수 있습니다. 노름을 해서 남의 돈을 딸 자신도 없지만 돈을 잃는 사람을 생각하면 노름은 할 수 없습니다. 주머니를 털어 색싯집에라도 가서 실컷 마시고 취하고 싶지만 그럴 용기도 없습니다. 시골 장날 모인 사람들은 대개가 이런 사람들입니다.
할 수 없이 학교 운동장 나무 그늘을 찾아가 오징어를 안주 삼아 소주를 마시며 삶의 울분과 답답함을 털어냅니다. 긴 여름 해가 저물도록 소주를 마십니다. 하루쯤은 잔뜩 취해서 답답함을 털어내고 싶습니다. 오징어를 찢으며 함께 소주를 마실 수 있는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것만도 큰 다행이라 여깁니다. 어느새 긴 여름 해도 저물어 파장(罷場)입니다. 조기 한 마리 새끼줄에 묶어 흔들며 집으로 돌아갑니다. 환한 달빛만이 달랑거리는 조기의 그림자를 어둡게 만들고 있습니다.
파장(罷場)은 아침에 열렸던 장이 저녁이 되면서 끝났다는 뜻입니다. 오늘 하루 장(場)은 끝났지만 5일 뒤에 장은 다시 섭니다. 그러나 수천 년을 이어온 넉넉하고 인심 좋은 농촌 풍경의 해체는 언제 회복될지는 가늠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넓고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지 않고, 취하지 않고서는 걸어갈 수 없겠지요.
[사진출처] 네이버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