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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귀소본능(歸巢本能)이 있다

말의 힘

by 인문학 이야기꾼

‘뿌린 대로 거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모든 일에는 원인에 따라 결과가 생긴다는 뜻이죠. 콩을 심으면 콩이 나고, 팥을 심으면 팥이 나는 것이 세상 이치입니다. 콩을 심어 놓고 팥이 나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이자 어리석음입니다. 이기주 작가는 『말의 품격』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인간의 말이 나름의 귀소본능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 언어는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태어난 곳으로 되돌아가려는 무의식적인 본능을 지니고 있다. 사람의 입에서 태어난 말은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냥 흩어지지 않는다. 돌고 돌아 어느새 말을 내뱉은 사람의 귀와 몸으로 다시 스며든다.”

귀소본능(歸巢本能)은 동물이 자신이 태어난 곳이나 서식지에서 멀리 떠났다가 다시 그 장소로 돌아오는 성질을 말합니다. 연어는 민물에서 태어나 대부분의 생애를 바다에서 보내다가 산란을 위해 자신이 태어난 하천으로 돌아옵니다. 연어의 귀소본능이죠. 추석이나 설 명절에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이 태어난 고향을 찾는 귀성객을 보면 사람도 귀소본능이 있습니다. ‘가는 말이 고우면 오는 말이 곱다’라는 속담이 여전히 유통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말도 귀소본능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나쁜 말을 해놓고서 고운 말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은 콩을 심고 팥이 나기를 바라는 것과 같지 않겠는지요.


마태복음 7장 12절에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라고 합니다. 남에게 대접 받기 위해서 남을 대접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는 대접을 하지도 않고 대접 받기를 바라는 것은 아무 것도 심지 않고 팥이 나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맹자(孟子)도 ‘出乎爾者 反乎爾者(출호이자 반호이자 – 너에게서 나온 것은 너에게로 돌아간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네 글자로 만든 것이 ‘출이반이(出爾反爾)’입니다. 백성들이 기근에 시달릴 때 나라에서 도와주지 않다가 나라가 어려울 때 백성들의 도움을 받으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 맹자의 생각입니다. 백성들의 불충(不忠)을 탓하기 전에 어진 정치를 베풀어 백성들을 감화시켜야 나라가 어려울 때 백성들이 나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을 수 있다는 것이 맹자의 생각입니다.


어느 책에서 읽은 내용입니다. 공주처럼 귀하게 자란 딸이 시집을 갔습니다. 며느리가 되어 처음으로 시부모님 밥상을 차렸습니다. 죽도 아니고 밥도 아닌 이상한 밥이 되었습니다. 죄송한 마음으로 “아버님! 제가 밥을 했는데 죽도 아니고 밥도 아닌 이상한 밥이 되었습니다.”라고 했죠. 혼날 각오를 하고 있던 며느리에게 시아버지는 “아이구! 아가! 요즈음 입맛이 없어서 죽도 먹기 싫고 밥도 먹기 싫었는데 고맙구나! 어디 이상한 밥 한번 먹어보자.”라고 합니다. 이 말 한마디가 며느리를 감동시켰고, 이 말은 며느리가 평생 맛있는 밥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상한 밥이 된 것은 이미 현실입니다. 이상한 밥을 했다고 며느리에게 욕을 한들 이상한 밥이 맛있는 밥이 될 리도 없습니다.


말은 귀소본능이 있어서 반드시 되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특히 나쁜 말은 덤까지 붙어 돌아오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상대에게 유리한 말을 하는 것이 나에게도 유리합니다. 이는 아첨(阿諂)과는 다릅니다. 언어의 기능에는 지시적 기능도 있지만 사교적 기능도 있습니다. 잘 지내느냐고 물을 때, 의사가 물으면 지시적 기능이지만 일반적으로 물을 때는 사교적 기능으로 묻는 것이죠.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에게 사교적 기능으로서 첫대화를 할 때, “몇 년 못 보는 사이에 폭삭 늙었구나!”라고 이야기해서야 되겠는지요? 그러면 돌아오는 답은 뻔한 답이 돌아오게 마련입니다. 이왕이면 “나이를 거꾸로 먹는구나! 갈수록 청춘이네!” 등과 같이 상대에게 힘이 될 만한 말을 하는 것이 나에게도 친구에게도 유리합니다. 의사가 아닌 바에야 늙어가는 자연의 이치를 새삼 들추어서는 피차간에 득이 될 게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말의 귀소본능을 옛시조도 지적하고 있습니다.

말하기 좋다 하고 남의 말을 말을 것이

남의 말 내 하면 남도 내 말 하는 것이

말로써 말이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


말하는 데는 힘이 드는 것도 아니고 돈이 드는 것도 아닙니다. 또, 말하기는 자기를 과시할 수 있는 한 방법이 되기 때문에 말하기는 거의 본능에 가깝습니다. 그러니 예로부터 말조심하도록 가르쳐왔습니다. 내가 남의 험담을 많이 하면 남도 내 험담을 많이 하게 되어 있습니다. 남이 듣지 않더라도 그 사람의 장점을 이야기하는 것이 나에게도 남에게도 유리합니다. 유리한 길이 있는데 굳이 불리한 길로 갈 필요가 있겠는지요.

말은 한번 뱉고 나면 담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모든 것이 녹음되고 녹화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 자신의 말이 폭로되고 자신의 말이 자신을 옭아매는 포승줄이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말의 칼날은 외부에서만 날아오지는 않습니다. 자신이 던진 말의 칼날이 자신의 향해서 날아오는 것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자승자박(自繩自縛)이죠. 자기가 만든 포승줄로 자기를 묶는다는 뜻입니다. 자신이 했던 말이 자신을 옭아매는 밧줄이 되어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지 못하거나 지금의 자리에서 끌려 내려오는 빌미가 되는 것을 많은 사례가 증명하기도 합니다.


『명심보감(明心寶鑑)』에서 ‘言不中理 不如不言(언불중리 불여불언) 一言不中 千語無用(일언부중 천어무용)’이라고 말했습니다. ‘말이 이치에 맞지 않으면 말을 하지 않는 것보다 못하다. 한 마디 말이 맞지 않으면 천 마디 말이 쓸데없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말이 이치에 맞으면 천 마디 말을 다 해도 된다는 뜻일까요? 만고의 진리라 할지라도 때와 장소와 상황에 따라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습니다. 말을 해야 할 때와 하지 말아야 할 때를 가릴 줄 아는 것까지를 고려하여 말을 하는 것이야말로 이치에 맞게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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