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언삭궁(多言數窮)
할까 말까 망설이는 일은 하지 않는 편이 좋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할까 말까 망설이는 말은 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그런 말은 상대방이 듣기 싫은 말인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다언삭궁(多言數窮)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노자(老子)는 『도덕경(道德經』에서 ‘다언삭궁 불여수중(多言數窮 不如守中)’이라 했습니다. ‘말이 많으면 자주 궁지에 몰린다. 할 말을 마음속에 담고 있는 것만 못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꼭 필요한 말은 해야 되겠지만 필요하지 않은 말을 애써 할 필요는 없습니다. 정철 카피라이터는 ‘법’이라는 제목으로 이런 글을 썼습니다.
-정철
아는 척하다 들통 나서 온 동네 창피 사는 법.
위로하고 충고한다며 지적질하다 사람을 잃는 법.
핵심을 강조하려다 오히려 핵심을 놓치는 법.
간단하다
말을 많이 한다.
아는 척하지 않았다면 자신의 실력이 들통나지 않고 창피를 당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충고한다며 지적질하지 않았다면 친구를 잃지도 않았을 겁니다. 간단합니다. 말을 많이 하면 궁지에 몰린다는 사실을 알고 말을 간단히 하면 됩니다. 정철 작가는 ‘한글자’면 충분하다고 합니다. 꼭 필요한 말은 한글자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한글자로 스승의 지위에 오른 사례를 들여다 보겠습니다.
일자지사(一字之師)라는 말이 있죠. 한 글자를 바로잡아 고쳐준 스승이라는 뜻입니다. 당나라 말기에 ‘제기(齊己)’라는 시승(詩僧)이 ‘조매(早梅:이르게 핀 매화)’라는 시를 지어 ‘정곡(鄭谷)’이라는 사람에게 보여줍니다. 그 시에 이런 구절이 있었습니다.
前村深雪裏(전촌심설리)
앞 마을이 깊은 눈 속에 묻혔는데
昨夜數枝開)(작야수지개)
어젯밤 매화 몇 가지 피었네
‘정곡’이라는 사람은 ‘昨夜數枝開)(작야수지개)’를 ‘昨夜一枝開)(작야일지개)’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해 줍니다. ‘이르게 핀 매화’라는 제목과는 ‘매화가 몇 가지 피었다’ 것보다는 ‘매화 한 가지가 피었다’는 것이 더 잘 어울리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정곡의 말대로 고칩니다. ‘앞마을이 깊은 눈 속에 묻혔는데 어젯밤 매화 한 가지가 피었네’로 고쳤더니 ‘이르게 핀 매화’의 정취가 한층 살아났습니다. ‘제기’는 저도 모르게 ‘정곡’에게 절을 하였고, 당시 사람들이 정곡을 한 글자를 고쳐준 스승이라는 뜻의 ‘일자지사’라고 불렀습니다.
만약에 정곡이 더 많은 말을 하고 더 많이 고치기를 주문했다면 제기와 정곡은 원수가 되었을 겁니다. 충고한다며 지적질하다가 사람을 잃는 꼴이 되는 것이죠.
연암 박지원의 ‘허생전’에서의 말하기 방식을 들여다 보겠습니다. 가난한 양반 허생이 장사를 하기 위해 한양에서 제일 부자인 변씨를 찾아가 만 냥을 빌리고자 합니다. 거지 차림에 담보도 안면도 없습니다. 부자 변씨는 당장 만 냥을 내줍니다. 변씨 집의 자제와 손들이 무슨 영문인지 궁금해 합니다. 그러자 변씨가 말합니다.
“대체로 남에게 무엇을 빌리러 오는 사람은 으레 자기 뜻을 대단히 선전하고, 신용을 자랑하면서도 비굴한 빛이 얼굴에 나타나고, 말을 중언부언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저 객은 형색은 허술하지만 말이 간단하고 얼굴에 부끄러운 기색이 없다. 그 사람이 해 보겠다는 일이 작은 일이 아닐 것이다.”
그렇습니다. 떳떳하지 못하면 말과 표정이 부자연스러울 수밖에 없고 몸짓과 행동이 과장될 수밖에 없습니다. 시 한 편을 수업하는데 교사가 그 시를 확실하게 이해하고 있으면 간명하게 설명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교사가 그 시에 대한 이해도가 낮으면 설명이 길어지고 중언부언하게 되죠. 변씨 부자는, 아니 연암 박지원은 이런 원리를 꿰뚫어 알고 있었나 봅니다.
말이 많으면 자주 궁지에 몰린다고 해서 할 말까지 안 하면 안 되겠지요.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을 수도 있고 꼭 필요한 한마디는 천 냥을 벌 수도 있습니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는 한마디 말의 소중함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이름을 불러주는 한마디 말이 이렇게 소중합니다.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아무 의미 없는 존재였는데 관심을 가지고 이름을 불러주는 순간 ‘꽃’이 됩니다. 할 말을 서로 가슴에 담아두면 꽃이 될 수 없습니다. 나는 너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을 불러주고, 너는 나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을 불러줄 때 서로에게 의미 있는 꽃이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너의 본질과 거리가 먼,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이름을 불러주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너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을 불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너를 꽃으로 만드는 일임을 생각한다면 한 글자의 소중함을 찾는 일을 게을리할 수는 없겠지요.
정민 교수는 『점검』에서 ‘견양저육(汧陽猪肉)’이란 말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견양 지방의 돼지고기는 맛있기로 소문이 났습니다. 중국 북송 때 시인인 소동파(蘇東坡)가 잔치에 쓰기 위해 하인을 시켜 견양 지방의 돼지를 사오게 했습니다. 하인이 돼지를 사오다가 술이 취해 돼지를 잃어버립니다. 난감해진 그는 다른 지방에서 돼지를 사옵니다. 잔치는 예정대로 열렸고 손님들은 견양 돼지라 맛있다고 입이 닳도록 칭찬합니다. 자리를 파하면서 소동파는 ‘여러분이 드신 돼지고기는 견양의 것이 아니다’고 사실대로 말합니다. 손님들은 머쓱해질 수밖에 없었죠.
견양이란 이름에 속는 것이나 그럴듯하게 꾸민 말에 속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말에 힘이 있음을 알고 그 힘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는 허망한 이름만 쫓지 말고 실상을 꿰뚫어 보는 지혜의 안목이 필요하다고 정민 교수는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