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택, '그 여자네 집'
시를 읽는 여러 이유 중의 하나는 현실 세계에서 직접 경험하기 어려운 정서와 느낌을 시를 통해 느끼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시를 읽으면 다른 사람이 처한 상황이나 정서에 쉽게 공감할 수 있습니다. 바늘로 팔뚝을 찌르면 아픔을 느끼듯이 시를 읽고 바늘로 찌르는 듯한 아픔을 느낀다면, 그래서 이런 아픔에 처한 사람들의 정서에 공감할 수 있다면 시 읽기는 성공한 셈입니다. 시인이 시를 쓸 때도 독자가 시를 통해 느낄 수 있도록 씁니다. 아픔이나 그리움, 슬픔이나 기쁨 등을 독자에게 직접 느끼게 하려면 일상적인 언어로는 어렵습니다. 일상적인 언어로는 설명하여 이해시킬 수는 있겠지만 느끼게 하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날개’라는 별명을 가진 ‘황진수(가명)’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황진수를 모르는 사람은 이름만 들어서는 황진수가 어떤 사람인지 상상이 안 됩니다. 황진수를 아는 사람도 이름을 들었을 때 상상을 통해 황진수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기호로서 황진수를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황진수를 모르는 사람도 ‘날개’라는 별명을 들으면 나름대로 상상을 할 수가 있습니다. ‘날듯이 잘 달리는가?’, ‘치킨을 먹을 때 날개만 먹는가?’ 등 다양한 상상을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날마다 개XX’라고 날마다 욕을 해 대니까 누군가 별명을 ‘날개’로 붙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상상이 여기까지 미치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별명을 듣고 그 사람을 느끼기 위해 상상을 할 수가 있으면 시 읽기의 절반 이상은 성공한 셈입니다. 이름이 일상적인 언어라면 별명은 시의 언어인 셈이지요. 결국 시 읽기는 별명을 통해 그 사람을 상상하는 것과 같이, 시를 읽고 화자가 처한 상황을 상상하고 그 상황에서 화자가 느꼈을 정서를 느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을이면 은행나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집
해가 저무는 날 먼데서도 내 눈에 가장 먼저 뜨이는 집
생각하면 그리웁고
바라보면 정다웠던 집
어디 갔다가 늦게 집에 가는 밤이면
불빛이, 따뜻한 불빛이 검은 산속에 깜박깜박 살아 있는 집
그 불빛 아래 앉아 수를 놓으며 앉아 있을
그 여자의 까만 머릿결과 어깨를 생각만 해도
손길이 따뜻해져오는 집
살구꽃이 피는 집
봄이면 살구꽃이 하얗게 피었다가
꽃잎이 하얗게 담 너머까지 날리는 집
살구꽃 떨어지는 살구나무 아래로
물을 길어오는 그 여자 물동이 속에
꽃잎이 떨어지면 꽃잎이 일으킨 물결처럼 가닿고
싶은 집
(중략)
그 여자가 꽃 같은 열아홉살까지 살던 집
우리 동네 바로 윗동네 가운데 고샅 첫집
내가 밖에서 집으로 갈 때
차에서 내리면 제일 먼저 눈길이 가는 집
그 집 앞을 다 지나도록 그 여자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저절로 발걸음이 느려지는 그 여자네 집
지금은 아,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집
내 마음속에 지어진 집
눈감으면 살구꽃이 바람에 하얗게 날리는 집
눈 내리고, 아, 눈이, 살구나무 실가지 사이로
목화송이 같은 눈이 사흘이나
내리던 집
그 여자네 집
언제나 그 어느 때나 내 마음이 먼저
가
있던 집
그
여자네
집
생각하면, 생각하면 생. 각. 을. 하. 면......
-김용택, '그 여자네 집' 중에서
‘그 여자가’가 열아홉살까지 살던 ‘그 여자네 집’은 지금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화자의 마음속에만 있는 집입니다. 수십 년이 지났지만 화자의 마음속에는 그 여자가 열아홉살까지 살던 모습 그대로, 어쩌면 그때보다 더 선명한 모습으로 남아있습니다. 어떤 모습으로 화자의 마음속에 남아있는지 상상의 세계를 산책해 보겠습니다.
그 여자네 집은 밤이면 따뜻한 불빛이 검은 산속에 깜박깜박 살아 있는 집입니다. 시간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밤일 때, 그 여자네 집을 상상하면 그 여자네 집은 어둠을 밝혀주고 따뜻함과 포근함으로 마음을 채워줍니다. 그 여자의 집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이 먼 세월을 건너뛰어 지금도 화자의 마음속에 빛으로, 따뜻함으로 살아있습니다. 그리움이란 아무리 지우려야 지울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때보다 더 선명한 감각과 모습으로 살아납니다. 그러니 그 여자네 집을 떠올리면 지금도 손길이 따뜻해질 정도로 그리움의 깊이가 느껴집니다.
그 여자네 집은 ‘물을 길어오는 그 여자의 물동이 속에 / 꽃잎이 떨어지면 꽃잎이 일으킨 물결처럼 가닿고 / 싶은 집’입니다. 물동이에 살구꽃잎이 하나 떨어집니다. 꽃잎이 일으킨 물결은 동심원을 그리며 물동이의 가장자리에 닿습니다. 가장자리에 닿은 물결은 다시 꽃잎이 떨어진 자리로 돌아옵니다. 파문(波紋)은 중심부에서 가장자리로, 가장자리에서 중심부로 무한 반복됩니다. 꽃잎 하나가 일으킨 물결처럼 ‘그 여자’와 ‘그 여자네 집’에 닿고 싶은 화자의 마음도 온 가슴으로 퍼져 나갔다가 그리움의 중심부로 몰려들기를 반복합니다. 그리움을 설명하기보다는 그리움의 파문이 무한 반복되는 화자의 마음을 물동이에 떨어진 꽃잎의 파문을 통해 느끼게 해주고 있습니다.
‘그 여자네 집’은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집 / 내 마음속에 지어진 집’입니다. 화자의 마음속에서는 시공을 초월하여 그때 지어진 집이 조금도 낡아가지 않고 오히려 닦고 닦아 마루며 기둥에 윤기가 흐르고 있습니다. 지금도 마음속에만 있는 그 여자네 집에는 살구꽃이 하얗게 피고 있습니다. 은행나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고 있습니다. 마당에 햇살이 비치고, 저녁 연기 올라가고, 뒤안에 감이 붉게 익고, 참새떼가 지저귀고 있습니다. 봄인데도 목화송이 같은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그리움의 깊이와 폭이 그때의 집을 더욱 견고하고도 선명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 시의 마지막 5행을 보면, 한 글자를 한 행으로 처리하기도 하고, 한 행에 쉼표와 마침표를 반복하기도 하며, 말줄임표로 시를 끝냅니다. 이런 표현은 ‘그 여자’와 ‘그 여자네 집’에 대한 그리움의 깊이를 느끼게 해주기 위한 시인의 배려입니다. 한 글자를 한 행으로 처리한 것은 낭독의 속도를 지연시켜 ‘그 여자네 집’에 대한 상상의 세계를 길게 이어가고 싶은 화자의 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쉼표나 마침표도 마찬가지입니다. 좀 쉬고 있으면 생각나고, 생각을 하지 말아야 되겠다고,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또 생각납니다. 그 여자네 집을 생각을 하면 가슴 먹먹함과 아련함이, 한 번만이라도 그 시공간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말줄임표에 담겨 있기도 합니다. 시에 사용된 쉼표와 마침표와 말줄임표마저도 독자의 상상력을 이끌어내고 그것이 그 여자와 그 여자네 집에 대한 그리움을 더 깊이 느끼게 해주고 있습니다.
함민복 시인의 ‘가을’이라는 제목의 시는 ‘당신 생각을 켜 놓은 채 잠이 들었습니다’라는 한 줄로 되어 있습니다. 이 시는 일상적인 말로 그리움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불을 켜 놓고 잠이 들면 불은 밤새도록 밝혀져 있듯이, ‘하루 86,400초, 잠시도 쉬지 않고 당신을 생각하고 있다’는 그리움의 깊이를 느끼게 해주고 있습니다. ‘그리움’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그리움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시인의 신비한 능력이 아니겠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