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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문학

이용악, '낡은 집'

by 인문학 이야기꾼

낡은 집

-이용악


(앞 부분 생략)


그가 아홉 살 되던 해

사냥개 꿩을 쫓아다니는 겨울

이 집에 살던 일곱 식솔이

어데론지 사라지고 이튿날 아침

북쪽을 향한 발자욱만 눈 위에 떨고 있었다.


더러는 오랑캐령 쪽으로 갔으리라고

더러는 아라사로 갔으리라고

이웃 늙은이들은

모두 무서운 곳을 짚었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제철마다 먹음직한 열매

탐스럽게 열던 살구

살구나무도 글거리만 남았길래

꽃 피는 철이 와도 가도 뒤울안에

꿀벌 하나 날아들지 않는다


어느 해 겨울, 이 집에 살던 일곱 식솔이 간밤에 감쪽같이 사라집니다. 오랑캐령(만주)나 아라사(러시아/연해주)로 갔으리라고 이웃 노인들이 말합니다. 일곱 식구가 야반도주를 해야 할 만큼의 상황이 어떤 것인지는 시에 직접적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당대 현실이 반영된 이런 종류의 시를 감상하기 위해서는 당대 현실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시 속의 인물이 처한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금성출판사 『한국사(2020년)』 교과서를 찾아보았습니다. 다음은 ‘일본의 토지 침탈’, ‘토지 조사 사업의 시행’, ‘고국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이라는 소제목으로 수록된 『한국사(2020년)』 교과서 내용 중 일부입니다.


러일 전쟁 중 일제는 한일 의정서를 체결하여 군용지를 점령하고, 철도 용지라는 명목으로 필요한 양보다 훨씬 넓은 토지를 빼앗았다. 일본은 이 과정에서 국유지를 강탈하였고, 사유지 또한 대한 제국 정부가 사들여 제공하도록 강요하였다. 이를 배경으로 일본은 1908년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각종 철도 부설권을 차지한 일제는 국유지는 물론 민간인 소유 토지를 철도 용지에 포함하여 빼앗았다.

한국에 진출한 일본인 농업 이주민은 동양척식주식회사로부터 토지를 매입하거나 개간 등을 통해 대지주가 되었다. 일제가 토지에 대한 지주의 배타적인 소유권을 보장함에 따라 지주제는 점차 강화되었다. 반면 경작권을 인정받지 못한 소작인들은 계약 기간에 따른 불안정한 지위와 고율의 소작료 부담 등으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19세기부터 시작된 국외 이주는 일제 강점기에 더욱 증가하였다. 한인들은 주로 만주, 연해주, 일본과 같이 비교적 가까운 지역으로 이주하였으나 하와이, 미국 본토, 멕시코 등 미주 지역으로도 이주하였다. 한인들은 생존을 위해 떠나거나 독립운동을 위해 떠난 이도 있었으며, 일제의 강제 동원에 의해 끌려간 경우도 있었다.

‘한국사’ 교과서는 ‘조선을 침탈한 일제는 여러 이유로 조선 백성의 땅을 빼앗았다. 땅을 빼앗긴 백성들은 경제적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만주 등지로 이주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교과서에 제시된 역사적 사실로 보면 이 시에서 ‘이 집에 살던 일곱 식솔’은 땅을 빼앗기고 경제적 어려움을 견디지 못해 고향을 떠난 것으로 보입니다. 즉, 일제의 수탈이 일곱 식솔을 허허벌판의 북쪽으로 내몬 것입니다. 역사는 ‘빼앗았다’,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이주하였다’ 등으로 역사가의 주관을 걷어낸 채 객관적 사실 위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독자는 교과서를 읽고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지식을 머릿속에 저장할 수 있습니다. 이런 지식을 바탕으로 역사의식이 형성되는 것은 그다음 문제입니다.

문학은 이런 역사적 사실을 전제로, 구체적인 인물을 등장시켜 그 인물의 생생한 삶의 모습을 그려내어 그 인물이 처한 상황과 정서를 상상하고 느끼게 합니다.


시의 앞부분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이 시의 시적 대상인 ‘털보네’가 살던 마을은 일제의 수탈 이전, 즉 ‘찻길이 놓이기 전’에는 평화로웠습니다. ‘털보네’도 당나귀와 소로 곡식을 싣고 다닐 정도로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찻길’로 상징되는 일제의 수탈 이후에는 당나귀도 없어지고 소도 없어집니다. 이 무렵 화자의 친구인 ‘털보의 아들’이 태어납니다. 마을 아낙네들은 ‘송아지래두 불었으면 팔아나 먹지’라며 차가운 한숨을 내쉬고, 털보의 속도 타들어 갑니다. 아들이 태어난 것을 축하할 수조차 없는 경제적 어려움이 털보네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화자의 친구인 ‘털보의 아들’이 아홉 살 되던 해 겨울에 ‘털보네’는 야반도주를 합니다. 다 빼앗기고 소작료마저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가난이 이들을 야반도주의 상황으로 내몬 것입니다. ‘사냥개가 꿩을 쫓아다니는 겨울’에 털보네 가족은 사냥개에게 쫓기는 꿩의 신세가 된 것입니다. 삶의 근거지에서 도망치듯 나왔지만 털보네 가족이 갈 곳은 없습니다. 사냥개의 위협이 조금이라도 덜한 북쪽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의 행선지는 오랑캐령(만주)이나 아라사(러시아) 정도가 되겠지만 그곳도 삶의 두려움만이 가득한 공간입니다.

‘북쪽을 향한 발자국만 눈 위에 떨고 있었다’는 표현이 고향을 떠난 털보네의 이주 생활이 순탄치 않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추위에 떨고, 사냥개의 추적에 떨고, 미래의 두려움에 떨며 털보네 가족은 기다리는 사람 없이 눈만 가득한 북쪽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털보네가 떠나고 난 뒤 털보네가 살던 집은 빈집이 되었습니다. 살구나무마저 수탈의 대상이 되었는지 그루터기만 남았습니다. 봄이 되어도 꽃이 피지 않고, 꿀벌 하나 날아들지 않는 낡은 집이 되었습니다.

털보네 가족의 과거와 현재를 다 알고 있는 화자는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고 있으나, 야반도주를 할 수밖에 없는 털보네 가족의 아픔만큼의 아픔을 시의 행간에 숨겨놓고 있습니다. 독자도 털보네 가족의 아픔과 절망감에 공감합니다. 그리고 독자는 털보네 가족을 문학적 세계가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 만난다면 털보네를 이렇게 만든 현실에 분노하며, 털보네와 아픔을 함께 나누고, 털보 가족의 손을 잡고 위로해주는 실천적 행동도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우리가 역사를 읽는 것은 과거 사실에 대한 지식을 늘리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역사를 읽는 것은 과거 사실을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든 귀감(龜鑑)으로 삼든, 과거의 사실을 현재에 적용하여 반성할 부분은 반성하고 이어갈 부분은 이어가려는 인식을 분명히 하는, 자기 나름의 가치관을 형성하기 위해서가 아니겠는지요.

이런 측면에서 문학도 마찬가지입니다.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은 화자가 처한 상황이나 정서에 공감하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은 문학 작품 속의 인물이 처한 상황과 정서를 느끼고 공감하는 것에서 나아가 현실 세계에서도 타인의 상황과 정서에 공감하고,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소통하며 더불어 살아가려는 의식과 실천이 소중하다는, 자기 나름의 가치관을 기르기 위해서가 아니겠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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