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림, '달, 달'
-신경림
마당에 자욱한 솔잎 내음
가마솥에 송편을 세 번 쪄내도록
객지 나간 딸들 기별 없을까
늙은 양주 민화투도 시들해질 쯤엔
노란 국화꽃 감으며 드는
으스름 땅거미도 서럽고
문득 문밖에 인기척 있어
반색하고 문 열고 내다보니
달이 눈부시게 차려 입고
대문을 밀고 들어서고 있다
그 뒤로 또 하나 달이
눈물과 한숨으로 나무에 걸린 어스름
한가위 명절입니다. 농촌의 늙은 부부는 객지에 나간 ‘딸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번 명절에 고향에 온다는 소식은 없었지만 ‘딸들’과 함께 명절을 쇠기 위해 송편을 찌고 있습니다. 어제 찐 송편이 식어 다시 찌고 있습니다. 송편 찌는 냄새는 마당에 가득하지만 ‘딸들’은 아직도 오지 않았습니다. ‘딸들’을 기다리는 일이 무료하여 부부는 민화투를 칩니다. 민화투를 치고 있지만 늙은 부부의 시각과 청각은 온통 밖을 향하고 있습니다. 땅거미가 내려앉습니다. 명절 당일 밤은 깊어가는데 ‘딸들’은 아직도 오지 않습니다.
바람 소리인지 밖에서 인기척 소리가 들립니다. 반가운 기색으로 문을 열고 내다봅니다. 한가위 보름달이 눈부신 모습으로 대문을 밀고 들어서고 있습니다. 대문으로 들어서는 보름달 뒤로 또 하나의 달이 눈물과 한숨으로 나무에 걸려 있습니다. 눈물과 한숨으로 나무에 걸려 있는 ‘달’은 눈물과 한숨으로 지새고 있을 ‘딸들’의 모습입니다.
도시화, 산업화의 바람을 타고 ‘딸들’은 도시로 갔습니다. 공장에 취업은 했지만 열악한 근무 환경과 방세 내기에도 벅찬 월급밖에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차마 고향의 부모님께 할 수 없습니다. 여러 명이 방 한 칸을 쓰며 방세를 절약하지만 저축은커녕 하루하루 먹고 살기에 빠듯합니다. 풀빵으로 끼니를 때우기도 합니다. 이번 추석에도 고향에 다녀오기 어렵습니다.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추석에 고향에 못 간다는 소식 전하는 것도 미안합니다. 소박하지만 꿈을 안고 대처로 왔지만 그 소박한 꿈마저 꿀 수 없는 현실을 차마 부모님께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보름달은 늙은 부부가 ‘딸들’을 기다리는 고향집 마당에도 쏟아져 내리고, ‘딸들’이 있는 서울 산동네 가파른 계단에도 쏟아져 내립니다. 고향의 부모는 마당의 모과나무에 걸려 있는 보름달에서 눈물과 한숨으로 지새는 ‘딸들’의 모습을 봅니다. 서울 딸들은 산동네 가파른 계단에 걸려 있는 보름달에서 눈물과 한숨으로 자신을 기다릴 고향의 부모님의 모습을 봅니다. 풍요로운 한가위에 휘영청 밝은 보름달은 눈물과 한숨으로 고향집 모과나무에 걸려 있는 딸들을, 서울 산동네 가파른 계단에 걸려 있는 부모님을 더욱 그립게 만듭니다.
그러고 보니 제목의 ‘달, 달’은 ‘달, 딸’이 제격인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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