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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숲을 풍요롭게 하는 것들

신경림, '겨울숲'

by 인문학 이야기꾼

겨울숲

-신경림


굴참나무는 허리에 반쯤 박히기도 하고

물푸레나무를 떠받치기도 하면서

엎드려 있는 나무가 아니면

겨울숲은 얼마나 싱거울까

산짐승들이나 나무꾼들 발에 채여

이리저리 나뒹굴다가

묵밭에 가서 처박힌 돌멩이가 아니면

또 겨울숲은 얼마나 쓸쓸할까

나뭇가지에 걸린 하얀 낮달도

낮달이 들려주는 얘기와 노래도

한없이 시시하고 맥없을 게다

골짜기 낮은 곳 구석진 곳만을 찾아

잦아들 듯 흐르는 실개천이 아니면

겨울숲은 얼마나 메마를까

바위틈에 돌틈에 언덕빼기에

모진 바람 온몸으로 버티는 마른풀이 아니면

또 겨울숲은 얼마나 허전할까


지난 여름의 풍성했던 나뭇잎이 색깔의 변화에 이어 이제 다 떨어졌습니다. 나뭇잎으로 가려졌던 숲의 맨살이 다 드러납니다. 그래서 겨울숲은 숲의 맨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가 있습니다.

지난 태풍에 뿌리가 약한 나무 한 그루가 쓰러졌습니다. 완전히 쓰러지지는 않고 반쯤은 굴참나무에 걸려 있습니다. 굴참나무에 자신의 체중을 싣고 있으면서도 물푸레나무를 떠받치고 있습니다. 이렇게 도움을 주고 받으며 겨울숲은 숲의 앙상함과 싱거움을 해소하나 봅니다.

언제 어떻게 생겨났는지 모를 크고 작은 수많은 돌멩이들도 숲을 이루는 구성원들입니다. 산짐승의 발에 차이고 나무꾼들의 발에 차여 이리저리 나뒹굴다가 더 구를 곳이 없는 낮은 구석에 처박혀 있습니다. 이런 하찮은 돌멩이들도 겨울숲은 부끄럽다 여기지 않고 다 드러내 보여줍니다. 이런 돌멩이들이 있음으로 해서 겨울숲은 오히려 쓸쓸하지 않습니다.

지난 여름 가슴 가득 물을 안고서 위용을 뽐내던 실개천은 그 많던 물들을 낮고 구석진 곳으로 다 흘려보냈습니다. 이 겨울에 조금 남아 있는 물은 돌 틈 사이에 양보하고 스스로는 실개천의 흔적으로만 남아 있습니다. 그래도 그 실개천이, 돌 틈 사이로 흐르는 물소리가 새들의 울음소리와 어우러져 겨울숲을 메마르지 않게 합니다.

여름숲을 짙푸르게 했던 풀들도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 이제 모진 바람 온몸으로 맞으며 서걱서걱 아픈 소리를 내며 눕고 일어서며 버티는 마른풀이 되었습니다. 스스로는 좋은 자리를 찾아갈 수 없어 바람에 자신의 삶의 터전을 맡기면서 겨울숲의 그 바람으로 인해 허전하지 않습니다.


우리네 삶도 겨울숲과 같지 않겠는지요? 주목받지 못하는 나무들과 돌멩이들과 실개천과 마른풀이 겨울숲을 풍요롭게 하듯이,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우리가 사는 세상을 세상이게 하고, 세상을 풍요롭게 하는 구성원이지 않겠는지요?

겨울숲에 소나무만 있다면 겨울숲이 삭막하고 허전하고 쓸쓸하고 메마르듯이, 잘난 사람과 잘난 생각만 있다면 우리네 삶이 얼마나 메마르겠는지요? 나만이 잘났고, 나의 생각만이 옳은 것이 아니라 남도 남의 생각도 나름의 존재 가치가 있기에 이들이 어우러져 우리의 삶의 숲이, 우리의 생각의 숲이 풍요롭게 되지는 않겠는지요?

[사진출처] 네이버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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