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달인’이라는 TV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한 분야에 종사하며 열정과 노력으로 그 분야 최고의 경지에 오른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프로그램이죠. 주차의 달인, 큐브의 달인, 물수제비의 달인, 줄넘기의 달인, 가위바위보의 달인 등을 보면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줄넘기는 도구도 간단하고 어디에서나 할 수 있어서 누구나 할 수 있는 운동이죠. 보통사람들은 줄넘기를 할 때 1단 뛰기가 기본이고, 2단 뛰기까지는 가능합니다. 그런데 줄넘기의 달인은 물구나무를 서면서 줄넘기를 하고, 엉덩이로 앉아서 줄넘기를 하고, 리본을 가지고 리듬 체조하듯이 줄넘기를 합니다. 이렇게 다양한 형태의 줄넘기가 있는 줄 저는 TV를 보고서야 알았습니다. 2단 뛰기도 힘든데 6단 뛰기가 가능하겠습니까? 줄넘기의 달인에게는 6단 뛰기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독서가 취미인 사람이 취미로 책을 읽는 것은 평범한 일상입니다. 등산이 취미인 사람이 등산을 하는 것도 평범합니다. 줄넘기가 취미인 사람이 줄넘기를 하는 것도 평범하죠. 그러나 1초에 일곱 회전 줄넘기를 한다면 평범이 아니죠. 달인에게는 평범이겠지만 제가 볼 때는 비범입니다.
가위바위보는 달인이 있을까요? 평범한 두 사람이 가위바위보를 한다면 이기고 질 확률이 거의 50%입니다. 그런데 이길 확률이 75%를 넘어간다면 평범하다고 할 수 있겠는지요? 가위바위보의 달인도 있습니다. 가위바위보의 준비 동작은 주먹으로 시작합니다. 주먹을 낼 사람은 준비 동작의 주먹에 힘이 들어가고, 보를 낼 사람은 주먹이 느슨해지며, 가위를 낼 사람은 검지와 중지가 약간 느슨해진다는 겁니다. 준비 동작에서 실행까지 그 짧은 시간에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지 어느 부위가 느슨해지는지를 판단하고 자신의 가위바위보를 결정해야 합니다. 달인은 실제 그렇게 해서 엄청난 승률을 자랑합니다. 이쯤 되면 평범이 아니라 비범인 거죠. 열정과 노력이 평범을 비범으로 만든 겁니다. 평범한 사람들은 평범이 비범이 되기까지의 노력과 열정은 보지 않고 현재 드러난 비범만 보고 감탄하게 됩니다. 누구나 평범을 자신만의 비범으로 바꿀 수 있는 분야를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1990년대 고등학교 교무실의 모습은 지금과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일반 교실 세 칸 정도를 터서 길게 두 줄로 자리 배치를 했습니다. 전화기도 출입문 입구에 한 대가 있어서 저 끝에 계신 선생님께 전화가 오면 ‘~선생님! 전화왔습니다’하고 크게 소리치면 달려와서 전화 받던 시절이었습니다. 남자 선생님들이 훨씬 많던 시절이었죠. 교무실에서 담배를 피는 것이 당연시되던 시절이라, 교무실 자신의 책상 위에는 재떨이가 필수품처럼 놓여 있었습니다. 선생님들은 대부분 구두를 신고 다녔기에 책상 밑에는 구두가 필수품처럼 놓여 있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은 학교에 구두를 닦으러 오시는 분이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이분에게 일주일에 한 번은 구두를 닦습니다. 구두에 솔질을 하고 약을 바르고 입김을 불기도 하고 가스에 불을 붙여 구두에 가열하기도 하며 정성을 다합니다. 그러면 먼지를 뒤집어 쓴 구두가 반짝반짝 빛이 납니다. 저는 빛이 나는 과정이 신기하여 구두 닦는 모습을 자주 구경하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더 신기하게 여긴 것은 구두 닦으시는 분의 구두 감별 능력입니다. 선생님들이 출근하면 구두를 벗어 책상 밑에 두고 슬리퍼로 생활합니다. 책상 밑에 놓인 선생님들의 구두를 이분은 착착 수거하여 교무실 복도에서 작업을 합니다. 구두를 옮길 때 팔에 올리고 손가락에 끼우고 한 번에 열 켤레를 쉽게 옮깁니다. 구두를 다 닦으시고 구두 주인의 자리에 정확하게 갖다 놓습니다. 저는 매일 같이 생활해도 그 선생님의 구두가 어떤 것인지 알기는커녕 자리도 정확하게 모릅니다. 책꽂이에 꽂혀 있는 책을 통해 자리를 판단할 뿐입니다. 그런데 이분은 구두의 주인을 정확하게 알고 구두 주인의 자리가 어디인지도 정확하게 압니다. 반짝반짝 빛나는 구두 열 켤레를 팔에 얹고 손가락에 끼워 원래의 위치에 정확하게 둡니다.
너무 신기하여 어떻게 구두의 주인과 주인의 자리를 정확하게 아는지 물어보았습니다. ‘선생님은 1반 국어 시간에 수학책을 들고 2반에 들어간 적이 있습니까?’라는 대답을 들었을 뿐입니다. 이분은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오전과 오후에 각각 1개 학교를 지정해 구두를 닦으십니다. 토요일 오전까지 총 11개 학교의 300~400명 선생님의 구두와 자리를 정확하게 아시는 생활의 달인이죠. 이분에게 평범한 일상이 저에게는 비범으로 다가왔습니다.
『장자(莊子)-달생(達生)』의 ‘목계’도 비범한 능력을 지녔지만 평범하게 보입니다. ‘기성자’라는 사람이 그렇게 만든 거죠. ‘나무로 만든 닭’이라는 뜻의 ‘목계지덕(木鷄之德)’에 대한 이야기를 보겠습니다.
닭싸움을 좋아하는 왕이 자신의 싸움닭을 ‘기성자’라는 사람에게 맡겨 훈련시킵니다. 열흘이 되어 왕이 묻습니다. “내 닭이 이제 싸울 만한가?” “아직 안 됩니다. 강하긴 하나 교만하여 자신이 최고인 줄 알고 있습니다.” 열흘이 지나자 왕은 다시 묻습니다. “아직 안 됩니다. 교만함은 버렸으나 다른 닭의 소리에 너무 쉽게 반응합니다.” 열흘이 지나 또 묻습니다. “아직도 안 됩니다. 상대를 노려보는 눈초리가 너무 공격적입니다.” 열흘 후에 또 묻습니다. “이젠 되었습니다. 상대가 나타나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습니다. 마치 나무로 만든 닭 같습니다. 다른 닭들은 이 닭을 보기만 해도 도망칩니다.”
무협 영화를 보면 무림의 고수들은 함부로 싸우지 않습니다. 싸워야 될 상황에서도 피하기만 하죠. 이제 막 무술을 시작한 사람들은 자신의 실력을 가늠하기 위해 좌충우돌 싸우게 되죠. 무림의 절대 고수는 먼저 칼을 꺼내지 않습니다. 칼집으로 방어만 합니다. 이쯤 되면 상대가 고수임을 알아차리고 도망을 가는 것이 살 길이 되죠.
목계는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닭이지만 싸움 실력은 비범합니다. 평범이 모여 비범이 된 것입니다. 어느 누구와 싸워도 지지 않습니다. 싸워봐야 아는 것이 아니라 싸우기 전에 이기는 거죠.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상입니다. 최상이 되면 목계처럼 교만하지도 않고 공격적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교만하더라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싶어 합니다. 싸우지 않을 경우 자신의 싸움 실력을 보여줄 수가 없기 때문이죠. 남이 자신의 실력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싸워서 자신의 실력을 뽐내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것이 억울합니다. 보험을 들었기 때문에, 보험 든 것을 뽐내기 위해 사고를 내야 하겠습니까? 싸우지 않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이기고 지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목계는 싸워서 이기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싸우지 않는 것이 목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