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왕리 방앗간

흥왕리 설희씨네 방앗간

by 인문학 이야기꾼

흥왕리 방앗간

-함민복


비곗살은 없고

뼈로만 된

관절마디가 둥글고

심줄이 질긴


동네에서 힘이 제일 셀 것 같은

방앗간집


설희씨 아버지와 설희씨

피댓줄 와당탕탕 돌아가는 곳에서

쌀겨 뒤집어쓰며 일을 해서인지

목소리가 크다 칼칼하다


흥왕리, 동막리, 여차리

벼 낟알 도맡아 빻아왔는데

방앗간 기계들을 세운다 하니

방앗간 참새들은 어디로 떠날까

방앗간 참새들도 다른 참새들보다

울음소리가 크고 칼칼할까


쌀 도정의 변천 과정을 보면 이농(離農), 도시화, 산업화의 이면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이 시는 1970년대 쌀 도정 방앗간의 모습을 간결하게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동력 발생의 근원이 되는 원동기가 와당탕탕 돌아가면 원동기에 연결된 크고 작은 피댓줄이 함께 돌아가고, 이 피댓줄에 연결된 많은 기계들이 요란한 떨림으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원동기에 딸린 여러 장비들은 불필요한 사치품 없이 꼭 필요한 기계들로만으로 벼 낟알을 쌀로 만들어냅니다.

방앗간은 몇 동네를 합쳐 설희씨네 방앗간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 당시에 방앗간을 가지고 있으면 부잣집으로 통했습니다. 이 시에서 방앗간 주인은 원동기처럼 힘이 세고 목소리가 크고 칼칼하지만 ‘설희씨’라는 이름을 통해 풍기는 이미지는 순결한 마음씨를 지닌 순박한 사람 같습니다. 설희씨 아버지는 설희씨라는 아들인지 딸인지와 함께 쌀겨 뒤집어쓰며 방앗간에서 일을 합니다. 설희씨네는 여러 동네의 쌀을 도정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 방앗간보다 더 좋은 기계가 이곳저곳에 들어왔습니다. 몇 동네 쌀 도정을 도맡아 왔는데 더 좋은 기계 때문에 설희씨네 방앗간은 이제 문을 닫을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동네의 구멍가게가 읍내의 슈퍼마켓 때문에 문을 닫는 것과 같은 이치이지요.

더 좋은 기계는 발전과 편리함과 풍요로움을 상징하기는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방앗간을 매개로 살아가던 설희씨네 가족들,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던 수많은 참새들은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요? 도정기라는 새로운 기계는 낟알을 흘리지 않기 때문에 참새가 먹을 쌀도 없지요. 도정을 하지 않으니 도정의 대가(代價)도 없습니다. 그러니 설희씨네 가족이 먹을 쌀도 없습니다. 설희씨네 가족의 처지가 참새의 칼칼한 울음소리로 울려 퍼집니다. 기계에 의해 사람이 내몰리는 현상은 앞으로 더 좋은 기계가 나오면 나올수록 심화되겠지요.


인간이 만든 기계에 의해 인간이 내몰릴 수밖에 없는 현실, 내몰린 인간이 사방을 두리번거려 보아도 갈 곳 없는 현실을 시인은 크고 칼칼한 참새의 울음소리로 대변하고 있습니다. 발전의 이면에 있는 소외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지나치지 않는 시인의 감수성이 아프게 다가옵니다.


[사진 출처] Pixabay 무료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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