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덕 아범

씨앗 하나로 세상을 얻었는데

by 인문학 이야기꾼

유덕 아범

-함민복


그는 씨갑시장수였다

장날마다 씨갑시 옹기종기 거닐고

쭈그려 앉아


들판의

여름을 봄에 팔고

가을을 여름에 팔던

씨갑시장수 유덕아범

장터 후미진 곳에 앉아서도

한 고을 들판을 훤히 외고

자신이 판 씨앗 튼실한 곡식 되어

장에 나는 것 보고 환히 웃던


그가 떠나갔다

시내버스 생기고 장날이 썰렁해지자

몰골이 꾀죄죄하던 유덕아범


이 시는 근대화 과정에서 일자리를 잃고 힘겹게 살아가는 인물의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덕 아범은 씨갑시장수입니다. ‘씨갑시’는 ‘씨앗’의 충청도 방언입니다. 유덕 아범은 상추, 참깨, 들깨, 참외, 수박, 콩, 팥, 고추…… 등 많은 씨앗들을 팔아서 생계를 이어갑니다. 5일장이 서는 날이면 여러 씨앗들을 옹기종기 늘어놓고 씨앗을 팝니다. 장이 서지 않는 무싯날은 이 마을 저 마을 다니면서 자신이 판 씨앗들이 얼마나 튼실하게 자라는지 살핍니다. 철마다 다른 씨앗들을 팔면서, 철마다 다른 씨앗들이 곡식이 되는 과정을 살피러 다니느라 온 들판을 훤히 욀 정도입니다. 자신이 판 씨앗들이 튼실한 곡식으로 자란 들판을 보면서 좋은 씨앗을 판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낍니다. 계절이 바뀌고 자신이 판 씨앗이 곡식이 되어 장에 나는 것을 보고 뿌듯함도 느끼게 되죠. 이것이 유덕 아범의 보람입니다. 항상 바쁘지만, 비록 작은 씨앗을 팔고 있지만 마음만은 누구보다도 풍요롭고 넉넉했습니다.

시내버스가 생겼습니다. 시내버스가 새마을 운동으로 넓어진 도로의 혜택을 입어 마을 곳곳을 다닙니다. 마을 사람들은 시내버스를 타고 읍내 5일장이나 읍내 상설시장에 장보러 갑니다. 면소재지 5일장은 읍내 시장에 밀려 썰렁해집니다. 읍내에는 그럴듯한 포장지에 포장된 종자(種子)들이 시내버스를 타고 온 마을 손님들의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유덕 아범의 씨앗으로 자라던 곡식들이 읍내 종묘상의 씨앗으로 바뀌어 자랍니다. 유덕 아범은 판 씨앗이 없으니 둘러볼 들판도 없습니다. 유덕 아범은 썰렁해진 장터만큼이나 자부심도 잃고 웃음도 잃었습니다. 유덕 아범은 자신이 판 씨앗들로 풍요로웠던 들판의 모습을 마음속으로만 그려볼 뿐입니다.


근대화는 사람들의 삶을 확 바꾸어 놓았습니다. 길이 넓어지고, 이동 수단이 생기고, 대처에 슈퍼마켓이 생겼습니다. 면소재지 5일장에서 팔던 좀약, 고무줄, 참빗 등의 잡화들이 사라졌습니다. 톱이 무뎌졌을 때 톱을 벼리던 사람, 고무신에 구멍이 났을 때 고무신을 때우던 사람도 사라졌습니다. 발전이란 많은 사람들에게 편리함과 풍요로움을 제공하지만, 어떤 사람들을 자부심 가득한 삶의 현장에서 밀어내는 결과도 가져왔습니다. 그렇다고 삶의 현장에서 밀려난 사람들을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지 못했다고 비난할 수 있겠는지요? 앞으로 삶의 현장은 더욱 빠른 속도로 변화하겠죠. 많은 사람들은 변화의 속도에 편승해서 편리함과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변화의 속도에 소외되어 유덕 아범의 길을 걷게 될 수 있겠지요. 변화라는 버스를 함께 타고 모두가 편안하고 넉넉한 여행을 할 수는 없겠는지요?


[사진출처] Unsplash 무료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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