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을 머금은 산 - 운길산

마녀 아줌마의 세상

by Stella

날씨가 좋을 거라는 일기예보와 이른 새벽 나갈 수 있는 상황이 맞아떨어졌다. 어딜갈까? 고궁 혹은 근교 산성? 거긴 9시에 오픈이니 그런 시간적 제약이 없는 곳으로 가고 싶어서, 경의중앙선 운길산역 2번 출구로 나가면 등산로 입구를 쉽게 찾을 수 있고 등린이에게도 무난하다는 정보만 달랑 들고 서식지를 나섰다.


경로는 운길산역 - 운길산 정상 - 수종사 - 운길산역이다. 대중교통으로 쉽게 갈 수 있고 풍광도 아름다워서 정말 좋았지만 마녀아줌마 기준으로 볼 때 절대! 무조건! 초보코스 아니다. 사실 한국의 산은 '악'자가 붙었든 안붙었든 초보코스는 없는 듯. 말하자면 난위도 '상-중-하'가 아니라, 난위도 '상-상상-상상상' 만 있다는 게 나의 개인적 소견이고, 따라서 등산화-스틱-장갑은 필수품목이다.


운길산역 2번 출구로 나가면 운길산과 예봉산 이정표가 있다. 등산고수들은 운길산과 예봉산 연계산행을 즐기는 듯 한데, 나는 일단 운길산쪽으로 향했다. 등산로 입구로 가는 길조차 환상이었다. 아래 사진들은 저가 핸드폰으로 막 찍고 보정도 안한 건데, 전날 내린 비 때문인지 청명한 하늘을 배경으로 산에 걸린 구름에서 신성한 기운마저 느낄 수 있다. 서울에서 한시간도 안가서 이런 풍경을 본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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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문제는 등산로가 예상보다 훨씬 '야생적'이라는 사실이었다. 며칠동안 비가 내려서인지 땅에도 물이 흥건하고 낙엽까지 있어서, 스틱도 없이 잘 올라가는 다른 고수들과는 달리, 등린이 아줌마는 방수 트레킹화와 스틱이 없었다면 그냥 돌아왔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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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가는 내내 사진찍을 엄두도 못냈다. 양손에 스틱들고 바닥에는 물이 흥건하고, 날씨가 덥지도 않는데도 조그만 날벌레들이 떼거지로 따라다녔다. 정상까지 약 2.7킬로이고 1시간 반이면 올라간다고 했지만 그건 내게 해당되는 말은 아니었고, 심지어 정상에 거의 도달했을 무렵 가파른 바위를 만나 도저히 못갈 거 같아 그냥 돌아서려고 했는데 뒤따라 오던 어떤 등산객이 몇 미터만 더 가면 되고, 갈 수 있는 길이라고, 낙엽 말고 바위나 돌을 밟고 가라고 용기를 북돋아주는데다가, 내려가는 길도 만만찮아서 그냥 올라갔다.


결론은 '올라가길 잘 했다'이다. 구름인지 안개인지 모르겠지만, 610미터 산에서 마치 비행기에서 본 것 같은 하얀 구름은 처음 보는 듯하다. 다른 등산객의 말에 따르면 운길산에서 드물게 보는 멋진 전경이라면서, 아마 전날 내린 비 때문에 그런 거 같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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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에서 한참 동안 사방을 둘러보았다. 이렇게 힘든 줄 알면 안왔을 곳인데 내가 여길 언제 또 올 수 있을까 싶어서 멋진 전경을 마음에 꾹꾹 눌러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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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내려갈 일이 까마득 남았다. 정상에서 조금 내려오면 갈림길이 나온다. 왔던 길로 내려가는 방향과 수종사 방향으로 갈 수 있는데 나는 수종사로 향했다. 이 길도 만만한 길이 절대 아니다. 하지만 경사도가 더 심해서 그런지 줄난간이 설치되어 있어서, 그거 붙잡고 내려가면 힘은 들어도 안전한 거 같아서 마음이 좀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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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림길에서 수종사까지 상당히 멀다. 한참을 낑낑대며 내려오니 주차장이 나와서, 난 거기가 수종사인줄 알았지만 왠걸, 다시 긴 계단을 올라가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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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종사는 상당히 유명한 절인 듯, 방문객도 많았는데, 거기서 보는 전경도 그림처럼, 화보처럼 아름답다. 아래는 수종사의 보호수와 그 앞으로 펼쳐진 전경이다. 운길산 정상에서 본 것이지만 더 자세히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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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내 한쪽에 또 하나의 긴 계단이 있다. 너무 피곤해서 올라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에라, 여길 또 언제오나 싶어서 올라가니 또 다른 전경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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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종사가 뷰 맛집이라더니 그건 사실이다. 자 이제 진짜로 내려갈 일이 남았다. 힘들어서 도저히 산길로는 못가겠고,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대로로 내려왔는데, 흠, 산길보다는 쉽지만 진심 가파른 아스팔트길이라서 그리 만만한 건 절대 아니었다. 어쩌면 산길보다 더 아줌마 무릎 다치기에 딱 적당한 것 같아서 정말 조심스럽게 천천히 내려왔고, 거기서부터 운길산역으로 가는 길에서 본 마을 풍경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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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뎌 운길산역에 도착했다. 이 역에서는 상봉역 방향 경의중앙선이 30분 정도의 간격을 두고 운행된다. 시간이 남아서 물의 정원에도 갈까 싶었지만 아무래도 자전거 라이딩 길 인듯 했다. 그런데 우연히 버스정류장 옆을 지나다가 버스노선표를 보고 있는데, 때마침 두 시간 간격으로 오는 버스가 도착했다. 기사님에게 물어보니 팔당역까지 간다고 해서 어차피 그 역에서도 경의중앙선을 탈 수 있으니 그냥 한번 타고 가보기로 했다. 우연천만의 여정이군!


결론은 우연이지만 그 버스 타길 잘 했다. 팔당역까지 남한강변을 따라가는 노선이라 가는 길이 너무 좋았다. 팔당역 주변에는 시립미술관(추석연휴라서 휴관)도 있고 팔당유원지로 갈 수 있고, 놀 거리가 많은 듯,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기운이 남았다면 팔당유원지에도 가고 싶었으나 그건 다음 기회에...


정말이지, 안전하게 다녀온 것도 감사하고, 이렇게 아름다운 전경을 볼 수 있었다는 것도 감사하고, 우연히 버스 드라이브를 한 것도 감사하고. 온통 감사하고 고마운 날, 이런 게 행복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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