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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oA Sep 06. 2017

사랑이 아니라 말하지 말아요

영화 <시인의 사랑>

 해당 글은 영화 <시인의 사랑>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브런치 무비 패스를 통해 관람했습니다.


 시인(양익준 분)은 아내(전혜진 분)와 함께 제주도에 산다. 그곳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열심히 수첩에 적어가며 시를 써나간다. 정기적으로 출석하는 동인 모임에서 그의 시는 '재능은 있으나 고생이 느껴지지 않는 시', '삶의 밝은 부분만 있는 시'라는 평가를 받는다.


 창작의 고통을 차치하고서도 그의 생활은 충분히 남루하다. 글쓰기 수업에서 처음 만난 아이들은 '시인이 그렇게 뚱뚱해도 되냐'는 질문을 던진다. 집에서는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아내의 바람에 못이겨 관계를 맺지만 무기력한 그의 마음을 따라 좀처럼 아이는 생기지 않는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에서 그려낸 시인의 모습이 불편한 현실을 마주하고 돌파하는 인간의 형상이었다면, 영화 <시인의 사랑>에서 시인은 결코 시인이지 못하다. 자신을 사랑하냐는 아내의 물음에 사랑한다고 응답하면서도 그는 영화 내내 이를 증명해내지 못한다. 시인(是認)*하지 못하는 시인의 모습은 되려 새롭게 찾아온 사랑에 의해 아내에 대한 그간의 감정이 사랑이 아니었음을 타의적으로 반증하게 된다.

 *시인하다 : 어떤 내용이나 사실이 옳거나 그러하다고 인정하다.


 시인은 도너츠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한 소년(정가람 분)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뜻하지 않게 찾아온 감정에 시인은 당황하고 관객을 비롯해 시인의 주변 인물들은 그 감정의 실체를 궁금해한다. '그래서, 그 아이와 하고 싶냐'는 아내의 노골적 추궁부터 '아저씨, 내가 불쌍해서 그래요?'라는 소년 본인의 물음까지, 에로스의 화살을 맞은 시인은 어느새 윤리적 질문의 폭격을 받는 새로운 세계(에티카)의 한가운데 위치하게 된다.


소년과 시인.


 시인의 사랑이 현실을 무너뜨리기 시작하는 영화의 중반-소년을 만나 쓴 시를 아내가 몰래 읽어보게 된 순간-, 시는 돌연 모습을 감춘다. 자신을 떠나지 말아달라는 아내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소년에게 가길 선택하는 파국의 순간에도 시는 어떠한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다. 어떠한 역할도 할 수가 없다. 시는 인간을 대신해 답을 점지해 주는 선지자가 아닐뿐더러, 시련을 함께 극복해 내는 조력자도 되어주지 못한다. 영화는 갈등 속에서 시와 시인의 역할을 최소화함으로써, 어느 한 중년 남성의 일탈적 불륜기라는 지극히 미시적인 서사를 구축한다.


시인은 대신 울어주는 사람이야.

 

 글쓰기 수업에서 시인이 '시인은 대신 울어주는 사람'이라고 정의 내리는 장면은, 영화 속 시인 자신의 숙명을 가리키는 신탁이 되어 스스로에게 되돌아온다. '함께 가자'는 시인의 부름-시인이 자신의 감정에 가장 적극적으로 응답한 순간-에 소년은 끝내 응답하지 않는다. 대신 눈물 흘리는 한 인간만이 남는다. 뒤늦게 비당 문학상을 수상 받아 시인으로서의 입지를 인정받고, 아내와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아이를 낳아 가장으로서의 입지를 지켜나가지만, 영화 <시인의 사랑>에서 시인은 의심의 여지없이 자신의 사랑을 지켜내지 못한, 실패한 인간이다.


 기능하지 못하는 남성과 기능하지 못하는 시, 영화 속 서글픈 인간의 실패를 변호하기 위해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말을 아래에 옮긴다.


세상의 꽃은 세상의 칼을 이기지 못한다.
그러나 그 백전백패의 아름다움만이 서정의 본진이고 문명의 배수진이다.

- 신형철 저 <느낌의 공동체> 中


 시인은 결국 자신의 사랑 앞에 놓인 장애물을 극복하지 못하고 눈물짓는 길을 따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은 알고 있다. 누구보다 소년을 사랑하는 시인이 여기 있음을. '고생이 느껴지지 않는', '삶의 밝은 부분만 있는' 시를 써오던 시인에게서 지금쯤 더 아름다운 시가 쓰여지고 있을 것임을. 그 백전백패의 아름다움을 따르는 시인이 있어, 인간이 한층 성숙해질 수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내 사랑이 사랑이
아니라고는 말하지 말아요
보이지 않는 길을 걸으려 한다고
괜한 헛수고라 생각하진 말아요

내 마음이 헛된 희망이라고는
말하지 말아요
정상이 없는 산을 오르려 한다고
나의 무모함을 비웃지는 말아요

그대 두 손을 놓쳐서
난 길을 잃었죠
허나 멈출 수가 없어요
이게 내 사랑인걸요

그대 두 손을 놓쳐서
난 길을 잃었죠
허나 멈출 수가 없어요
이게 내 사랑인걸요

내 사랑이 사랑이
아니라고는 말하지 말아요
그대 없이 나 홀로 하려 한다고
나의 이런 사랑이
사랑이 아니라고
나를 설득하려 말아요


- 이소라 노래 <사랑이 아니라 말하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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