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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oA Aug 21. 2017

맞은편 그 사람

영화 <더 테이블>

해당 글은 영화 <더 테이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앉는다. 두 사람의 간격은 1미터가 채 되지 않는다. 하나의 카페, 하나의 테이블, 하루 동안 그곳을 다녀간 네 개의 인연. 영화는 꾸밈이나 첨언을 철저히 배제하고 맞은편에서 맞은편으로 각도만을 바꿔가며 두 사람의 대화를 모자람 없이 담는 데 집중한다.


 김종관 감독은 영화 <더 테이블>이 7일이라는 짧은 촬영 기간을 가진 소품 같은 영화라고 밝혔다.


 영화가 그 소규모의 현장과 관계에 몰두하는 동안, 스크린을 바라보는 관객은 자연스럽게 관찰자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영화 속 인물들의 말과 행동은 오직 맞은편의 상대만을 향하기 때문에 관객들은 별다른 선택지 없이 오로지 그 사이를 엿듣고, 엿보는 (그럴 수밖에 없는) 입장에 처하게 된다.


 설령 극 중 인물이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딴청을 부리더라도, 그 행위조차 여과 없이 맞은편 상대에게 전달되기에 영화 내내 이 2인의 구도-그리고 그들을 지켜보는 카메라와 관객의 배치-는 결코 깨지지 않는다.



 이 불평등한 영화적 구조 속에서 관객들은 몇 가지 인상적인 체험을 하게 된다. 먼저, 인물들은 알지만 관객들은 모르는 것들-두 사람이 언제 처음 만났고, 어떤 경험을 공유해 왔으며, 지금은 어떤 사이인지, 와 같은 극 중 생략된 사전 정보들-을 수집하는 과정을 거친다. 처음에는 테이블 위로 오고 가는 대화 내용에 집중하다가 나아가 주고받는 눈빛과 목소리에 실린 감정들을 읽어내려 애를 쓴다. 이를 통해 관객들은, 두 사람이 한 때 서로 사랑했지만 지금은 헤어져 각자의 인생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 또는 사기 결혼을 위해 가짜 모녀를 연기하고 있는 비즈니스 관계라는 것, 또는 오랜만에 만난 자리이지만 그동안 연락이 없었던 상대에게 서운함을 느끼고 있다는 것 등 수집한 정보에 기초해 흐릿했던 그들의 관계를 차츰차츰 밝혀나가게 된다.


 인물들이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을, 모르는 우리가 알아가는 일련의 과정이 충분히 진행되고 나면 상황은 급격히 변화한다. 인물들이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것을, 알고 있는 우리-안다고 자부하는 우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맞은편 그녀의 마음을 몰라주는 남자를 보며 '어쩜 저렇게 이기적일까'하고 혀를 차거나 실소를 터트리면서, 이전까지 관찰자에 머물러있던 관객들은 어느새 영화에 적극적인 개입을 시도한다. 나만큼은 맞은편 그 사람의 심정을 속속들이 이해할 수 있다는, '나는 다를 거야'라는 단단한 착각에 사로잡힌 채로.


왜 마음 가는 길이랑 사람 가는 길이 달라지는 건지 모르겠어.


 상대의 진심과 거짓을 판정하는 이 오만한 추리 게임의 끝에는, 누구보다 서로를 사랑하지만 그 진심을 표현하지 못하는 혜경(임수정 분)과 운철(연우진 분)의 이야기가 자리한다. 원치 않는 결혼을 앞두고 자신을 붙잡아 주길 바라는 혜경과, 누구보다 그녀와 함께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운철의 마음이 테이블 위로 오고 간다. 그 진심을 쉽사리 털어놓지 않는 운철의 태도에 서운할 법도 한 혜경이지만, 그녀는 마음 가는 길과 사람 가는 길이 일치하지 못하는 아이러니를 지적하며 그마저도 괜찮다는 듯 웃고 만다.

 이 지점에서 앞선 관객들의 추리 게임은 모두 무용한 것으로 돌아간다. 표현하지 않아도 전달되는 진심, 아니, 거짓을 말할수록 더욱 선명해지는 진실을 혜경과 운철은 알고 있다. 그리고 표현된 진심만이 가치를 갖는 건 아니라는 걸, 더구나 진심을 표현한다 할지라도 현실이 쉽사리 바뀌는 것 또한 아니라는 걸 두 사람은 보여준다.

혜경과 운철.


우리 서로, 잘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지금부터 알아가요, 우리.


 카페는 공연성 없는 공연장, 밀실과도 같은 광장으로 기능한다. 그 내밀한 공간 안에서, 우리는 맞은편 그 사람의 은밀한 속내를 확인하고 싶은 욕망을 품는다.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옛 연인이면서 옛 연인보다 못한 관계(첫 번째 에피소드)이기도 하고, 가짜 모녀이면서 진짜 모녀만큼이나 돈독한 관계(세 번째 에피소드)이기도 하다. 이 난해한 관계의 역학을 통해, 영화는 관계에 대해 이름 붙이고 정의 내리고 증명하려는 우리의 욕망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조명한다.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경진(정은채 분)과 민호(전성우 분)는 관계의 깊이가 두텁지 않다. 첫 만남 이후 민호는 혼자서 훌쩍 해외로 떠나버렸고, 여행 내내 연락 한 번 없던 그의 무책임한 태도가 경진은 못마땅할 뿐이다. 맞은편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행동에 담긴 의도는 무엇인지, 모든 것이 안갯속에 있을 뿐 서로의 감정은 불투명한 상태이다. 답답하기만 한 상황 속에서 경진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 하고, 그 순간 민호는 은채의 손을 붙잡는다. 여행지 곳곳에서 그녀를 생각하며 산 선물들을 아이처럼 꺼내 놓으며 웃는 민호. 여전히 은채는, 그리고 관객들은 이 철없는 남성을 신뢰할 수 없다. 하지만 그 판독 불가의 상황에서 민호는 '우리 서로 잘 모르잖'냐며 서로의 무지와 모호함을 스스럼없이 인정한다. '지금부터 알아가'자는, 맞은편 그 사람에게 건네는 수줍은 고백과 함께.




2인용 탁자에 네가 앉아
네 맞은편에 내가 앉아
다른 모든 것들은 침묵하고
내 목소리와 네 목소리만이
밀물과 썰물처럼 오고 가는 사적인 시간

바다가 달에 끌리는 은밀한 인력이
우리 사이에도 자리하던 그곳에서
시가 피어나고
너와 나는 탈을 벗었네

우리 사이에 항상 있던 2인용 탁자가
밉지 않았던 지난 계절
마주한 그 간격을
가지를 뻗치고 잎을 틔우며
얼기설기 초록빛으로 싱그럽게 채워가던
푸른 봄

서로 다른 뿌리를 가진
나무 두 그루가
서로 같은 가지를 뻗어
한 그루 나무가 되는 일

애초부터 하나였던 양
시치미를 떼는 편안함이
얼마나 위대한 감정인지
도대체가 당신이라는 사람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 건지


- 유리병편지 <연리목*>

* 연리목[連理木] 뿌리가 서로 다른 나무의 줄기가 이어져 한 나무로 자라는 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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