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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oA Mar 19. 2018

시대착오적 판타지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

해당 글은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브런치 무비 패스를 통해 관람했습니다.


영화는 2003년 간행된 이치카와 다쿠지의 소설 <지금 만나러 갑니다(いま、会いにゆきます)>를 리메이크 한 작품이다. 이미 2004년 일본에서 한 차례 영화화, 최종 흥행 수익 48억 엔의 큰 흥행을 거둔 작품이다.

여러모로 성공이 보장된 도전이라고, 기획 단계에서 이미 충분한 의견이 오고 갔을 것이다. 한국판 <지금 만나러 갑니다>의 개봉일은 2018년 3월 14일,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시점이다. 거기에 영화를 이끌어갈 주연으로 소지섭, 손예진까지 캐스팅했으니 이 얼마나 완벽한가.



나는 원작 소설도, 동명의 일본 영화도 보지 않았다. 원작 소설부터 큰 흥행을 거둔 작품이니, 영화는 상당수 '이야기의 힘'에 기댈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2018년 <지금 만나러 갑니다>에서 어떠한 이야기의 힘도 느끼지 못했다.


영화를 간단히 소개하면 죽은 아내가 기억을 잃은 채 가족들 곁에 다시 돌아오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룬 판타지 로맨스다. 설정에서부터 판타지임을 자처하니, 이것은 현실에서 결코 일어날 리 없는 비현실의 이야기다. 영화는 시작부터 그림책과 내레이션을 가져와 앞으로 한 편의 동화 같은 이야기가 펼쳐질 것임을 시사한다. 남은 건 이 판타지-심지어 원작을 통해 알 사람은 이미 알아버린 이야기-를, 어떻게 관객들에게 울림 있게 전달하느냐다. 



2018년 <지금 만나러 갑니다>는 관객들에게 과연 어떤 울림을 주는가? 영화는 유머 코드에 적잖이 힘을 준 것으로 보인다. 물론 웃음은 호감을 불러일으키고, 비현실의 이야기를 우호적으로 받아들이게끔 하는 장치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술 취한 친구가 펭귄 옷을 입고 나타나 뒤뚱거리다 넘어지는 모습, 숙맥인 남자 주인공이 첫 데이트에서 핫핑크 정장을 입고 나오는 모습은 우리에게 실소 이상의 무엇이 될 수 있는지 생각해보자. 관객들은 '코미디 빅리그'를 보려고 영화관에 앉아있는 것이 아니다. 아니, 영화가 로맨스와 코미디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는 모습은 눈치 없이 아무 때나 '최불암 시리즈'를 줄줄 읊는 부장님과 다를 바가 없더라.


남자 주인공은 기억을 잃은 여자 주인공에게 열심히 과거를 설명한다. 어떻게 그들이 만났고, 어떻게 그들이 사랑에 빠지게 됐는지. 하지만 영화는 이 모든 로맨스를 적당히 설명하고, 파스텔톤 배경 위에 올려 세워서, 감초 역할을 해 줄 시시콜콜한 유머들을 적당히 섞어 넣어, 관객들이 위화감 없이 이 판타지 로맨스를 받아들이게 하는 데 급급해 보인다.


처음 손을 잡을 때 떨림, 마침내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을 때 두근거림과 같은 섬세한 사랑의 결은 흔한 연애 소설 속 클리셰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좋은 배우들의 좋은 연기만으로 그 섬세함을 전달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면, 이 또한 굉장히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이 영화에 하나도 공감할 수 없었다. 땔감이 충분히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불을 지피니, 극 말미에 기대할 수 있는 슬픔과 감동도 사라져 버렸다. 나는 학예회 무대에서 빨래 너는 법과 청소기 돌리는 법을 설명하는 아이와, 이를 지켜보며 눈물 흘리는 엄마의 모습에서 어떠한 감동도 느끼지 못했다.


'호접지몽(胡蝶之夢)'이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내가 잠시 나비가 된 꿈을 꾼 건지, 나비인 내가 사람 꿈을 꾸고 있는 건지 모르겠는 상태.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가 비록 비현실적인 설정을 취하고 있다 해도, 그것이 관객들로 하여금 이야기에 반감을 갖게 할 이유가 되진 않는다. 잠깐만이라도 나비가 된 기분을 느껴 영화 속 인물들과 함께 울고 웃으면 좋았으련만. 영화를 본 지 일주일이 지난 지금, 안타깝게도 나는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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