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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oA Apr 19. 2017

사랑의 색깔론

영화 <나의 사랑, 그리스>

<나의 사랑, 그리스> 공식 포스터


 사랑에 색을 하나 정한다면 과연 무슨 색일까. 언젠가부터 사랑은 부드러운 파스텔 톤의 것이 되어버렸다. 벚꽃, 풍선껌, 비눗방울, 하늘하늘한 레이스 같은. 아른아른하게 블러 처리가 되어 있는 낮은 채도의 것들. 영화 <나의 사랑, 그리스>의 첫 인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영화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포스터를 보자. 아이보리 빛의 배경과 전체적으로 톤 다운된 이미지, 그 속에 온기를 잔뜩 머금은 인물들. '그 곳에 사랑이 있었다'라는 카피는 또 어떠한가. 관객들은 기대할 것이다. 저마다 꿈꿔 왔던 낭만적 사랑에 대한 꿈결 같은 기대. 나 역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영화는 그 기대를 무참히 저버린다. 영화는 시작부터 어두운 골목길을 비춘다. 주인공 여자는 발걸음을 재촉하고 가로등 불빛은 불규칙하게 깜박거린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를 노리는 강도가 등장하고 곧장 몸싸움을 벌이는 형체들이 정신 없이 뒤엉킨다. 우리는 직감한다. <나의 사랑, 그리스>가 그려낼 사랑은 결코 순탄한 파스텔 톤의 것이 아님을.


 그리스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파랗다 못해 눈이 시린 바다와 그 위로 빛나는 태양, 조각 같은 하얀 건물들. 물론 그것은 그리스 산토리니 섬의 모습으로 엄연히 현실에 존재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현재 그리스를 관통하는 진실의 이미지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그리스의 부실한 국가재정 상황은 고용 문제를 사회에 만연케 하고 있으며 늘어나는 이민자들은 사회에 공포와 불안을 조성하는 하나의 사회 문제로 급부상하고 있다.

 영화는 '부메랑', '로세프트 50mg', '세컨드 찬스'의 세 가지 이야기로 구성되어있다. 겉보기에는 서로 연관없는 이야기 같았던 각각의 에피소드는 그리스의 다양한 사회적 갈등을 첨예하게 직시하다가 끝내 부메랑처럼 돌아와 우리 모두가 직면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가로지른다. 우리는 이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양상을 설명하지 못하고 약을 찾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사랑을 말한다. '그 곳에 사랑이 있었다'는 포스터 속 카피처럼, 세상이 아무리 어지럽고 불안할지라도 사랑은 있어왔고 지금에 와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꿋꿋이 밝힌다. 에로스의 화살이 초래한 비극에 의해 월계수로 변해버린 다프네, 그런 그녀 앞에서 망연자실한 아버지, 황금사과의 주인공으로 아프로디테를 택하고 거대한 전쟁의 서막을 연 파리스 등. 신화 속 사랑의 이야기가 지금에 와서도 꾸준히 변주되고 반복된다는 사실을 영화는 각각의 이야기를 통해 보여준다.


아폴론과 다프네


 그 중에서도 영화가 포착한 결정적 순간은 에로스와 프시케의 사랑 이야기다. 사랑 신(神)의 사랑 이야기라니! 하지만 그 둘의 사랑에는 몇 차례 위기가 찾아온다. 프시케가 에로스의 정체를 의심하고 한밤중에 그의 얼굴에 불을 비춘 순간, 그리고 페르세포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호기심에 의해 상자를 열어본 순간. 하지만 끝내 에로스는 프시케를 찾아와 입을 맞춤으로써 영원한 잠으로부터 그녀를 구해낸다.
 영화의 마지막 에피소드인 '세컨드 찬스'에 이르러 영화는 바로 그 사랑의 가치에 주목한다. 실패와 좌절에도 불구하고 찾아오는 제 2, 제 3의 기회. 사랑이 선사하는 재기의 순간을 영화는 세컨드 찬스라고 지칭한다. 에로스는 바로 그 반짝이는 찰나에 다가와 삶의 순간 순간을 아름답게 채색하는 역할을 한다. 그렇게 영화는 막을 내린다.

 사랑에 색깔이 있다면 과연 무슨 색일까? 비단 달콤한 분홍빛만은 아닐 것이다. 떠나는 이민자, 남겨진 파시스트, 공황장애를 앓는 사람들. 영화는 끝까지 그들의 뒤를 쫓는다. 하지만 크게 나아진 것은 없다. 카메라는 사회의 갈등과 인간의 실패를, 그 보정없는 날 것의 모습을 비춘다.
 다만 존재할 뿐이다. 제 2, 제3의 기회가 되어 줄 순간의 반짝거림이. 빛나는 사랑의 여지가. 에로스는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기회를 잡고 삶을 새롭게 색칠하기 위해서, 우리는 오직 기다리며 깨어있을 뿐이다.


서로 다른 언어를 쓰면서도 공감과 이해가 빚어지는 순간. <나의 사랑, 그리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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