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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물병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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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재우 Jun 07. 2017

‘봄비’의 장면들

밤새 잠을 설쳤습니다. 차바퀴에 튕겨져 환호성을 지르는 장난꾸러기 빗물 때문에. 미끄럼틀을 타는 아이의 웃음소리처럼 먼 곳에서부터 자라나서 귓가로 한꺼번에 쏟아지더군요. 혹은 전기주전자의 스위치를 켜면 아우성치는 찬물의 탄성(歎聲)처럼 소란스러웠습니다. 아주 오랜만에 만나는 봄비의 소리는.

     

빗소리만으로 잠을 설친 것은 아니었습니다. 소리의 끝에서 만나는 추억들. 그 잔상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워 눈을 감고 있어도 보이는 것이 많았습니다. 보이는 것마다 마음을 쓰다 보니 깨어 있을 수밖에 없었지요. 그러고 보니 저 빗소리가 폭죽놀이 화약의 심지 타들어 가는 소리처럼 들립니다. 빗소리 폭죽이 터질 때마다 피어나는 추억의 장면들. 봄밤의 스크린에 생기가 돕니다.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할머니가 머리를 감겨 주시던 장면이었습니다. 뜨거운 물을 바가지로 부을 때마다 할머니 입에서는 “스으으으으” 하는 마찰음이 새어 나왔습니다. 빗소리처럼 말이죠. 그 소리가 나면 꼬마인 저는 긴장과 이완을 동시에 경험했습니다. 곧 뜨거운 물이 머리에 닿겠구나 생각하며 숨을 한 번 꾹 참았죠. 그 순간을 넘기고 나면 따뜻한 물이 할머니 손길처럼 머리카락 사이사이를 어루만지는 위안을 느끼게 됩니다. 할머니의 존재가 그랬습니다. 궂은일이 생길 것 같으면 제일 먼저 경고해 주셨고, 궂은일이 있더라도 할머니 품에 있으면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폐암으로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성적이 떨어진 손자를 꾸짖던 할머니. 새벽녘에 방문을 열면 싸늘한 부엌에서 따뜻한 아침상을 준비하시던 할머니. 몇 번을 돌려봐도 눈가가 뜨거워지는 장면들입니다. 

    

다음으로 떠오른 것은 홍대의 2층 카페 안 장면입니다. 갑작스럽게 소나기가 내린 날이었습니다. 외근을 나갔던 저는 비를 피해 카페에 들어왔죠. 창가 자리에 앉아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셨습니다. 길거리에는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고, 세상의 모든 것들이 세찬 빗줄기에 씻겨 나가고 있었습니다. 무섭게 쏟아져서 장벽처럼 느껴지는 빗줄기의 안쪽에 있으니 고맙고 행복했습니다. 찻잔에 그려진 고양이가 그르릉 거리며 털을 비벼 올 것 같은 안락함. MBC 베스트극장 <소나기> 편의 움막집 속 소년처럼 그 순간 멈춰 버린 세상의 정적을 느꼈습니다. 소나기가 만들어 낸 일상의 작은 여유는 유럽 영화의 느린 화면으로 인화되었습니다. 이제는 ‘참 크래커’의 심심한 맛에 중독된 아저씨의 취향에 잘 어울리는 장면입니다. 지금도 소나기가 내리는 날이면 불쑥 2층의 카페에 뛰어 들어가 창밖을 내다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또 떠오른 것은 우산이 클로즈업된 장면입니다. 구체적으로는 365일 제 가방 속 바닥에 깔려 있는 우산 하나와 형형색색의 비닐우산들이죠. 초등학생인 저에겐 신비한 능력이 있었습니다. 비가 오기 전의 흙냄새를 잘 맡았습니다. 수업 시간 중에 끼쳐 오는 흙냄새를 맡고 우산이 없는 것을 걱정했었습니다. 교문 앞에서 우산을 들고 기다릴 엄마가 없었으니까요. 신비한 능력만큼 걱정의 시간이 남들보다 길었습니다. 그런 기억 때문일까요? 다 자라서는 가방에서 우산을 빼놓지 않았습니다. 언제 비가 오더라도 걱정할 일이 없게. 그리고 남들 우산을 살뜰히도 챙겼습니다. 우산이 없는 사람이 있으면 제 마음이 급해져서 비닐우산을 사다가 들려 보냈습니다. 유난히 우산을 안 챙기던 어느 친구에게는 시중에서 볼 수 있는 비닐우산을 종류별로 사 준 것 같네요. 그 친구, 그중에 하나라도 아직 간직하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우산’의 인서트는 결핍에서 시작하여 오지랖으로 마무리되는 성장기를 상징하는 장면입니다. 이런 내면까지 끄집어내다니, 봄비가 참 짓궂네요. 

   

빗소리가 편집한 몽타주 사이로 참 많은 추억들이 새겨져 있네요. 가랑비에 젖어가는 옷처럼 추억의 빛깔은 더욱 진해져 갑니다. 더 맞고 섰다가는 홀딱 젖어 무거워진 몸으로 출근을 할 듯해서 억지로 잠을 청합니다. 어디선가 이 빗소리를 함께 듣고 있을 당신은 어떤 영상을 보았을까요? 기회가 된다면 함께 보고 추억을 나누고 싶습니다. 그리고 봄밤의 환상을 연출해 낸 ‘봄비’를, 좋아하는 감독 리스트에 적어 두어야겠습니다. 코 고는 소리가 빗소리를 지워 버리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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