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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시끄러웠던 위로

by 박재우

공들였던 계약이 무산된 날이 있었단다. 몇 달 동안 준비했던 일이 바로 눈앞에서 무너지는 걸 지켜보는 건 정말 힘든 일이었어. 뭔가 잘못되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도 쉽지 않았고 이후에 닥칠 일들이 두려워 매일 밤을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었지.


그런데 그 힘든 시기에 너희 엄마가 주말에 야구장에 가자고 했었단다. 솔직히 말하면 그땐 야구를 볼 기분은 전혀 아니었어. 하지만 가족과의 시간을 망치는 건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해 억지로 따라나섰단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야구장에 발을 들이는 순간 기분이 조금씩 달라지더구나. 드넓게 펼쳐진 푸른 잔디를 보고 귀가 먹먹할 정도의 함성을 듣고 있자니 갑갑했던 마음이 한결 풀리는 것 같았지. 관중석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몸짓과 표정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어.


‘이 많은 사람 중에 나보다 더 큰 고민을 안고 온 사람도 있을 텐데 모두 저렇게 신나게 이 순간을 즐기고 있구나.’


나만 혼자 세상의 모든 짐을 짊어진 사람처럼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는 내 모습이 바보 같게 느껴지더구나.

그날 우리가 응원하던 팀은 초반부터 밀리고 있었어. 점수 차가 컸고 누구도 역전할 거라는 기대를 품지 않았지. 처음엔 나도 경기를 지켜보는 게 마냥 즐겁지는 않았어. 그런데 경기에 조금씩 몰입하다 보니 신기하게도 며칠 동안 나를 짓누르던 무거운 고민들을 잠시나마 잊게 되더구나. 시간이 흘러 8회 말, 누가 봐도 승부가 기울어 보이는 순간에 관중들 일부가 자리를 떠나는 게 보였어. 바로 그때 믿기 힘든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단다. 우리 팀이 거짓말 같은 연속 안타로 점수를 따라잡더니 결국 9회에서 끝내기로 역전승을 거둬 모든 관중을 열광하게 만든 거야. 경기는 끝까지 봐야 한다는 교훈을 나는 야유 대신 함성으로 배웠단다.


나는 그날 야구장에서 무언가 단단한 것이 내 마음속에서 다시 자라나는 것을 느꼈어. 힘든 상황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마음의 힘 말이야. 이제 와 생각해 보니 너희 엄마가 나를 야구장으로 이끈 것은 내가 좌절 속에 갇히지 않도록 손을 내밀어준 것이었어. 수많은 관중 속에서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된 것은 나를 옭아매던 어두운 생각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지. 무엇보다 그 기적 같은 역전승은 나에게도 아직 9회 말이 남아있다는 희망을 선물해 주었어. 나는 그날 이후 마치 다음 타석을 기다리는 선수처럼 다시 배트를 고쳐 잡기 시작했단다.


너의 삶에도 우리가 응원하던 그 팀처럼 속수무책으로 끌려가는 것 같은 순간이 찾아올 거야. 학업이든 인간관계든 혹은 네가 사랑하는 음악이든 모든 게 끝나버린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겠지. 가장 중요한 것은 남들보다 먼저 포기하고 자리를 떠나는 관중이 되지 않는 것이란다. 언제, 어떤 모습으로든 기회는 찾아오기 마련이니까.


너도 반드시 너만의 9회 말 역전극을 만들어낼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다음 기회를 기다리며 끝까지 경기장을 지키는 너의 모습 자체가 너의 삶을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멋진 명경기로 만들어줄 거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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