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선물했던 기형도의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에 실린 ‘질투는 나의 힘’이라는 시를 기억하니? 그 시에는 내가 청춘이라 불리던 시절, 주문처럼 되뇌던 구절이 있단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실수투성이에 가진 것도 변변치 않다고 느껴 나는 늘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며 부족함을 탓했지. 세상에 대한 질투는 어느새 나 자신을 향한 분노가 되었고 결국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는 지독한 자기혐오에 빠지기도 했어. 그런 나를 들키고 싶지 않아 오히려 더 대단한 척 나를 부풀리며 과장된 모습으로 살았던 부끄러운 시간들이었단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의 나는 내 삶이라는 책에서 그 부끄러운 페이지들을 어떻게든 찢어버리고 싶었던 것 같아. 실수와 자기혐오로 얼룩진 기록들을 깨끗이 지워내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완벽한 사람으로 다시 시작하고 싶었지.
하지만 과거는 결코 완벽하게 지워지지 않는단다. 그때 ‘팔림프세스트(Palimpsest)’라는 것의 지혜를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팔림프세스트’는 양피지가 귀했던 옛 시대에 이미 쓰인 글씨를 긁어내고 그 위에 새로운 글을 덧쓴 문서를 뜻하는 말이란다. 하지만 그때의 기술로는 옛 글의 흔적을 완벽하게 지울 수는 없어서 새로운 글의 행간 사이로 희미하게 옛 글의 자국이 남아있었다고 해.
나는 오랫동안 내 삶의 그 희미한 흔적들을 부끄러워하며 감추려고만 했어. 하지만 팔림프세스트의 진짜 가치는 흠결 없는 새 종이가 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희미한 옛 글의 흔적 위로 더 깊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덧쓰여졌다는 그 역사성에 있더구나. 용서란 바로 그런 것일지도 몰라. 실수투성이였던 나를 지워버리는 마법이 아니라 그 부족했던 나를 인정하고 그 흔적 위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용기 말이야.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고 고백했던 그 희미한 흔적이 있었기에 나는 비로소 나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고민하게 되었단다. 쓰라린 자기혐오의 기록이 있었기에 오늘의 나는 타인의 부족함을 조금 더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지. 이처럼 과거의 상처가 때로는 새로 쓰이는 글에 깊이를 더해주는 가장 중요한 배경이 되어준단다.
너의 삶이라는 양피지 위에도 언젠가는 지워버리고 싶은 부끄러운 문장들이 남게 될 날이 올 거야. 그때 그 흔적을 부끄러워하며 너의 페이지를 찢어버리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중요한 건 흠결 없는 백지를 갖는 것이 아니라 희미한 흔적 위로 어떤 새로운 이야기를 덧써 내려갈 것인가 하는 너의 의지일 테니. 너는 너의 희미한 흔적 위로 어떤 새로운 이야기를 덧쓰고 싶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