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거나 타거나 (19)
5.
첫째 큰아버지와 둘째 큰아버지가 늘 곰방대를 입에 물고 다닌 것처럼 아버지도 일할 때는 매우 자주 담배를 입에 물고 있었다.
아버지는 팔십 초반에 돌아가셨는데, 그의 생애 마지막 스무 해 정도를 제외하곤 평생 담배를 피우셨다. 아버지는 한국에서는 바깥에서 뿐 아니라 방 안에서도 자주 담배를 피웠는데, 그때는 지금보다 한국인들의 흡연율이 훨씬 높았으며, 담배를 피우지 않는 성인 남성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아버지는 담배 갑에서 마지막 담배를 꺼내 물 때면, 담배 갑을 한 손으로 꾸깃꾸깃 접으면서 나에게 담배 한 갑 사 오라고 심부름을 시키곤 했다. 나는 그 심부름을 하기를 좋아했다. 담배를 사고 남은 잔돈은 내 용돈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가 주머니에서 꺼낸 동전을 받아 들고 냉큼 대방시장 맞은편 강남중학교 담길에 있는 편의점으로 뛰어갔다. 잽싸게 담배 한 갑을 사서 돌아온 나는 두 손에 담배 갑과 잔돈을 들고 아버지에게 내밀었는데, 아버지는 담배 갑만 집어 들고 나머지는 “수고했으니까, 잔돈은 니 용돈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고맙습니다.”라고 말하고 동전을 쥔 채 뒤돌아 깡충깡충 뛰어나갔다.
사업을 하시는 아버지는 거의 언제나 바쁘셨기 때문에 시골에 있는 큰아버지처럼 멍하니 천장이나 빈 벽을 바라보고 있을 때가 없었다. 아버지는 특히 연기가 피어오르는 담배를 입에 문 채 일을 하실 때가 많았다. 입에 문 담배는 가만히 있어도 타들어갔으며, 푸른 연기가 하염없이 피어올라 아버지의 눈을 자극하였으므로 아버지는 이따금 매운 연기에 눈을 찡그리기도 하셨다. 입에 문 담배가 자꾸 타들어가서 작고 긴 원통처럼 생긴 회색 재가 기다랗게 되었을 때 나는 이제나저제나 그 재가 떨어질까 걱정했다.
“아버지 ‘재’요.”
아슬아슬하게 허공을 가르고 있는 기다란 담뱃재를 보고 내가 손으로 가리키면서 급하게 말하면 아버지는 그때서야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쥐어 들고 재떨이에 담뱃재를 털어내기도 했다. 그 사이에 담뱃재가 떨어지지 않으면 말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렇게 타들어간 담뱃재를 미처 재떨이에 털어내지 못할 때가 많았다. 담뱃재는 때로는 자신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똑 부러지면서 바닥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그런 까닭에, 담뱃재가 아버지의 바지에 떨어져서 작은 구멍이 나거나 탄 자국을 남기도 했다. 담뱃재가 떨어져서 생긴 바지 구멍은 구멍의 둘레가 검게 그을려서 금세 알아볼 수 있었다. 어머니는 그렇게 해서 생긴 구멍을 보고 핀잔을 주었다.
“제발 일할 때는 입에 담배 좀 물고 있지 말아요.”
그러나 아버지는 입에 담배를 문 채 일하는 버릇을 고치지 못했다.
그런 모습을 자주 본 나는 아버지가 담배를 피우면서 뭔가 하실 때면 아버지를 주시하면서 긴장했다. 담뱃재가 언제든 아버지의 바지나 방바닥에 떨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담뱃재가 방바닥에 떨어지면 지저분해졌고, 누군가 모르고 밟을 수도 있었으므로, 내가 하든 엄마가 하든, 그야말로 하지 않아도 되는 청소를 해야 했다. 담배를 피우시다가 재떨이가 근처에 없을 때 아버지는 나에게 재떨이 찾아오라고 말씀하실 때도 있었는데, 재떨이를 빨리 찾지 못하면 아버지는 급한 대로 화분에다 담뱃재를 털어냈다.
조금 더 큰 후에 나는 아버지가 담배를 물기만 하면 곧바로 재떨이를 찾아서 그 앞에 갖다 놓았다. 그리고 담뱃재가 길어지면 기다렸다는 듯이 재떨이를 아버지 얼굴 앞으로 재빨리 들이대면서 말했다.
“아버지, 담뱃재 떨어질라 그래요.”
“여보, 일할 때는 담배 좀 입에 물지 말아요.”
담뱃재가 떨어질 것 같아서 어머니나 내가 다급하게 말하면 아버지는 그때서야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담뱃재를 재떨이에, 재떨이가 옆에 없으면 화분에다 털어냈다. 그러나 그것도 그때뿐이고 조금 후면 마찬가지 상황이 이어졌다. 그래서 결국 어머니와 나는 아버지가 입에 문 담배에서 자라나는 담뱃재를 일일이 신경 쓸 수 없었다. 흙 위에 조개껍질이 놓인 화분에는 아버지의 담뱃재가 자주 쌓였고, 그것을 보면서 나는 담뱃재가 혹시 식물에게 영양분이 되나 생각했다.
지경 마을에서는 담배를 사는 것이 쉽지 않았다.
시골 사람들은 담배를 사서 피우기보다 스스로 담뱃잎을 이용해서 담배를 피우는 것이 보통이었다. 담배를 사려고 해도 가게가 집에서 가까운 곳에 있지도 않았다. 담배를 살 시간적 금전적 여유도 없었겠지만 여유가 있다 해도 담배를 사러 일부러 가게까지 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듯했다. 시골 어른들은 곰방대에 담뱃잎을 넣고 화로를 재떨이 삼아 피웠던 모양이다.
마을에서 담배를 살 수 있는 가게라고는 하루에 한 번 버스가 서는 정거장에 하나밖에 없었다. 그 가게에서 담배를 살 수 있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 같은데도, 가게 지붕 아래에는 외지인 보라고 있는 것인지, ‘담배’라고 손으로 적은 초라한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전깃불을 켜지 못해서 내부가 어두컴컴한 느낌을 주었던 그 가게는 넓지 않았고 일하는 사람이 내내 붙어있는 것이 아니라 문을 여는 시간도 제한되어 있었다. 서울에서 가지고 온 돈으로 사탕이든 과자든 사 먹고 싶어서 나도 그 가게에 두세 번 가본 적이 있지만, 가게 안에 사 먹을 만한 것은 거의 아무것도 없었다.
아버지가 서울에서 늘 담배를 입에 물었던 것처럼, 시골 큰아버지는 일할 때가 아니면 방안에서나 마당에서나 으레 곰방대를 입에 물었다. 담배를 피우거나 곰방대를 무는 것은 뭔가를 생각하든 하지 않든 시간을 보내기에 매우 적절한 방법이다. 일단 담배를 물면, 중간에 끄지 않는 한, 담배가 다 타들어갈 때까지 1분 정도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바깥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서 있기가 어색할 때 담배를 물고 있으면 뭔가 하고 있는 것 같아서 흡연자의 마음에 위안을 준다.
그런 이유로, 나도 대학 초기에는 도서관에 있다가 잠시 쉬기 위해 바깥으로 나올 때면 별수 없이 담배를 입에 물곤 했다. 담배라도 피우고 있으면 멍하니 있어도 뭔가 사색하고 있다는 느낌을 풍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또 담배 연기를 길게 뿜어내는 것이 약간 멋있어 보이기도 했고, 스스로 성인스럽고 남성적이라는 느낌도 들었다. 도서관 앞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도서관을 오가는 여학생들을 힐끗힐끗 보는 재미도 있었다. 그러나 원체 담배를 그리 좋아하지는 않는 데다 연기를 가슴속으로 삼키기 어려워했던 나는 겨우 뻥긋 담배만 피우다가 갑자기 담배 가격이 급등하면서 자연스레 담배를 끊게 되었다.
아버지가 담뱃재를 재떨이나 화분에 털어내는 것처럼, 큰아버지는 곰방대에서 다 탄 담뱃잎을 화로에다 털어냈다. 화로를 쓰지 않는 여름에 큰아버지는 방 안에서 곰방대를 물 때면 그 재를 어디에다 털어냈을까. 나는 겨울에만 시골에 가서 그런지 방 안에서 화로만 보았을 뿐 재떨이를 본 적이 없다.
내가 보기에 화로는 아주 크고 널찍해서 재떨이에 비해 담뱃재를 털어내기 편하게 생겼다. 큰아버지는 때때로 방바닥에 떨어진 거의 아무거나 주워서 화로 안에다 던져 넣었으니, 화로는 훌륭한 휴지통 역할을 하기도 했다. 겨울에 화로는 방안 공기에 온기를 주었고, 붉은 숯이 타올라 낭만적으로 보이기도 했으며, 훌륭한 휴지통 역할도 했으므로, 나는 대방동 우리 집에도 화로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대방동 집에서는 아궁이에 나무나 장작을 때지 않았으므로 화로를 사용할 수 없었다. 서울에서는 아궁이에 연탄을 피워서 구들장을 데웠고 아궁이가 없는 거실에는 긴 연통이 달린 연탄난로를 설치해서 따뜻하게 할 수 있었다. 연탄난로는 하루에 두세 번 연탄을 가는 일이 귀찮기는 했지만 꽤 지속적으로 따뜻할 뿐 아니라, 그 위에 뭔가를 데워 먹기도 좋고, 차가워진 손으로 긴 연통을 잡아서 따뜻하게 할 수 있었으므로, 그것대로 낭만이 있긴 했다.
엄마는 거의 언제나 난로 위에다 물 주전자나 냄비 등 뭔가를 올려놓고 데우거나 끓였지, 난로 위에 아무것도 없을 때는 거의 없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아무 때라도 난로 위에 있는 주전자에서 끓인 보리차를 마실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연탄난로는 부엌 아궁이에서 타던 나무 재를 모아 담은 화로 바로 앞에 붙어 앉아서 타는 숯을 보는 것만큼 낭만적이지는 않았고, 뚜껑이 없이 열려 있는 화로처럼 아무거나 던져 넣어서 태우기에 편리한 휴지통이나 재떨이 역할까지는 하지 못했다.
6.
하여간 어린 내가 아버지와 닮은 남자 어른을 보는 것은 약간 낯선 경험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조금 더 자란 후에 알게 됐다. 교회 친구들이 곧잘 나의 형과 내가 매우 매우 닮았다고 말하면서 특히 뒷모습을 보고 자주 헷갈려했던 것을.
중학생이었던 내가 교회 아래층 예배당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예배당에 있던 형의 친구들은 나를 보고 자주 놀렸다.
“야, 니 형이 왔는 줄 알았잖아. 어쩜 그렇게 똑같이 생겼냐?”
형의 후배들은 때때로 나를 보고 놀리느라고, “형님 오셨어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겸연쩍은 웃음만 지어 보였다.
나의 친구들도 놀릴 때가 있었다.
형의 뒷모습을 보고 나인지 알고 내 이름을 불렀다가 당황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형과 나를 “찐빵”에다 비유했다. 똑같이 찍어내어 매우 닮았다는 찐빵 말이다. 나는 내가 형과 똑 닮았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우리 형제가 그렇게 닮아 보였던 것이다.
아주 더 먼 훗날, 미국에서 형의 딸들이 자라면서 나에게 똑같은 의미의 말을 했다.
“삼촌, 아니 작은 아버지, 우리 아빠랑 너무 비슷하게 생겼어. 그래서 삼촌을 보면 이상해.”
“그래? 내가 너희 아빠랑 그렇게 비슷하게 생겼어? 내가 보기에는 많이 달라 보이는데.”
“아니야. 정말 비슷하게 생겼어. 얼굴도 그렇지만 발음하는 것과 말하는 것도.”
그렇다. 형제니까.
자신과 비슷하게 생긴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것은 종종 어색하긴 하지만 친근하고 든든한 일이기도 한다. 형제자매란 서로 그런 것이다. 한 배에서 나온 자손은 아마 그런 이유로 본능적으로 동질감을 느끼고 서로 의지하는 법이다.
그러나 그것도 어쩌면 이제 옛날 일인지 모르겠다.
요즘엔 자녀가 있어봤자 하나 둘이고, 나중에 성인이 될 때까지 시간이 더 지나면 친척과 가깝게 지내는 집도 많지 않다. 자녀들도 성인이 되어서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나면 더 이상 부모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다. 각자 알아서 짝을 만나 결혼하거나 혼자 살려고 하며, 따로 살림을 차리고 나면 부모나 형제들도 서로 보기 힘들고, 만난다 해도 반가움은 잠시에 불과하다. 핵가족과 개인주의 문화에서 성장한 그들의 자녀들은 더욱 그렇다.
그것은 옳다 그르다의 문제가 아니며, 개인 차원의 문제도 아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직업적으로 더욱 세분화되어서 서로 이해하기도 어려워졌고, 사는 곳도 더욱 멀어져서 만나기도 어려워졌으며, 사람들은 더욱 원자화되었다. 옛날처럼 대가족제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서 웬만해서는 서로 친척들이 대규모로 만날 일도 없다. 각 세대는 모두 분가하고 대가족제도를 무시한 채 독립적인 생활을 해도 아무 지장이 없다. 옛날처럼 친척이 모여서 서로 의지해야 먹고사는 세상이 아니라서 그렇다.
심지어 조부모도 손주들을 돌봐달라고 하면 싫어한다. 왜 아니 그럴까. 이제 겨우 자녀들이 독립해서 여생을 자유롭게 살려고 하니까 그들이 낳은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또 봐달라고 하니.
내 말은 모두 따로 독립해서 사는 게 당연하다거나 옳다는 것이 아니다. 개중에는 여전히 함께 살기도 하고, 분가해서 살아도 여전히 사이좋게 지내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은 삭막한 사회에서 서로 힘이 될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해서 사회는 이미 변했다. 그러면서 사람의 의식도 변했다. 산업화 시대를 넘어서 이제는 디지털 시대에 이르렀고, 과거에 어른들이 익숙했던 확장된 가족제도는 이미 대부분 해체되었다. 지금은 혼자 살거나 기껏해야 커플이 사는 가족이 전체 인구의 절반을 넘어섰다. 그야말로 개인주의자들의 시대가 도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