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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가는 길 - 마지막 인사 (2)

걷거나 타거나 (24)

by memory 최호인

3.


지경에 있었던 정월의 어느 맑은 날, 마을에서 어떤 노인이 돌아가셨다.


동네 사람들은 아침부터 그 집으로 모여들었다. 안방과 건넌방 외에도 넓고 평평한 마당 입구 왼편에 외양간 대신 사랑방이 있는 제법 큰 기와집이었다. 괴실에 있던 고모는 아침부터 큰아버지 집으로 오시더니 나를 데리고 그 집으로 갔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그곳에 모인 듯 집안 전체가 시끌벅적했다.


그때 시골의 장례식을 처음 보았다. 내가 네다섯 살 무렵 친할머니가 우리 집에서 돌아가셨고 장례식까지 치렀지만 그에 관한 기억이라곤 거의 없었다. 많은 어른들이 우리 집에 왔었고, 장의사에서 보낸 하얀 영구 버스만 기억난다.


서울에는 장의사라는 것이 있고, 길을 가다가 한자로 ‘부의’라고 적힌 등이 대문에 걸려 있으면 그 집이 초상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린 나는 ‘부의’가 적힌 붉은 등을 보면 무서워했으며 가까이 가지 않으려 했다. 특히 밤에 '부의'는 붉은빛으로 빛나고 있어서 쉽게 눈에 뜨였으며, 나는 차마 그 앞을 지나가지 못하고 길을 돌아가곤 했다. 관을 싣고 다니는 하얀 색깔의 영구버스가 지나가면 재수가 없다고 생각했고 얼굴을 돌려서 가능한 한 보지 않으려고 했다.




시골 마을에서 초상집 풍경은 이랬다.


내가 고모의 손에 이끌려 제법 근사한 기와집 안으로 들어갔을 때, 남성 노인들은 모두 안방에 둘러앉아서 대화하고 있었다. 거의 모두 하얀 한복을 입고 있었으며, 갓까지 쓰고 의관을 제대로 갖춘 분들도 있어서 사뭇 격식이 있고 의례적으로 보였다. 그 방 중앙에는 음식과 술을 올려놓은 낮고 둥근 상들이 있었다.


상주인 듯한 분들은 상복을 입고 마당에서 손님들을 맞고 있었다. 상복은 약간 누런 색깔이었는데 삼베옷이라고 했다. 젊은 남자들은 건넌방이나 마당에 깔린 멍석 위에 앉아서 시끄럽게 떠들면서 음식을 먹고 술을 마셨다. 멍석에도 여러 개의 상들이 있었고 부엌에서 동일한 음식들이 전달되었다.


초상집은 잔치라도 벌어진 듯했다. 동네 여성들은 거의 모두 부엌으로 모여든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끊임없이 수다를 떨면서 부지런히 음식을 만들고 이곳저곳에 앉아 있는 남성들에게 음식과 술을 날랐다. 쉴 새 없이 전이 부쳐졌고, 누런 주전자에 든 막걸리도 등장했다. 일부 어른들은 막걸리를 마시고 얼굴이 불콰해졌고 소리 높여 대화하기도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나는 잔치라도 벌어진 듯한 광경에 흥미진진해져서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나는 특히 맛있는 전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기를 기다리면서, 고모를 찾는 듯 일부러 부엌과 마당을 왔다 갔다 했다. 고모는 나를 멍석 위 한 구석에 앉게 하더니 틈틈이 먹을 것을 갖다 주었다.


그러나 그날은 잔칫날이 아니라 장례를 지내는 날이었으므로, 사람들은 이따금 본채와 떨어진 곳에 있는 사랑방에 들어가서 곡을 했다. 고모도 부엌에서 조금 계시다가 나오더니 나를 데리고 사랑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왜 그 방으로 들어가는지 아무것도 모른 채 고모를 따라 들어갔다.


방안에는 한쪽 벽에 병풍만 펼쳐져 있었고 아무것도 없이 깨끗했다. 고모는 방으로 들어서서 문을 닫자마자 바닥에 주저앉아서 앞으로 약간 엎드리더니, 갑자기 “아이고아이고” 하면서 우는 소리를 냈다. 고모는 그렇게 우는 소리를 내면서 이따금 손바닥으로 방바닥을 살살 내리치기도 했다.


나는 고모가 그렇게 우는 모습을 처음 봐서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상황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전혀 슬프지도 않았지만 나는 고모 옆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럴 때는 떠들거나 까불지 말고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었다. 난감한 상황에 처한 나는 낯선 풍경과 고모의 엉뚱해 보이는 행동을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하면서 그것이 장례식의 한 절차라고 짐작했다. 고모는 곡하는 소리만 그렇게 냈을 뿐 얼굴에 눈물은 흐르지 않았고 별로 슬퍼 보이지도 않았다.


고모가 곡을 하는 사이에 다른 동네 아주머니와 할머니도 방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고모 옆에 자리를 잡더니 고모와 같이 곡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들어오면서 한쪽 구석으로 밀려난 나는 더욱 난감해졌다. 문에서 더욱 멀어진 나는 혼자서 방을 나갈 수도 없었다. 고모가 언제까지 저렇게 울고 있어야 하는지 알지 못해 답답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고모는 옆에 앉은 아주머니와 곡을 하다 말고 잠시 두런두런 대화를 하기도 했다. 나는 고모에게 나가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틈이 나지 않았다. 고모는 다시 잠시 곡을 더 하더니 그제야 할 일을 다했다는 듯 일어섰으며, 그제야 나도 잽싸게 고모를 따라서 밖으로 나왔다.




4.


그 후에도 다른 아주머니와 할머니들이 차례로 그 방으로 들어가서 곡을 했다. 신기한 것은 남자들은 그렇게 곡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남성들은 곡을 하지 않는 것인지 헷갈렸지만, 그날 나는 여성들만 곡하는 것을 보았다.


곡이란 상가에서 죽음의 슬픔을 표시하는 가장 중요한 형식이고, 상을 당한 집안에서는 가능하면 곡이 끊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먼 훗날에야 알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장례에 관한 유교적 풍습이 그렇다는 것이다. 나는 그때 그 장례식을 본 것을 매우 귀중하게 생각한다. 그런 광경은 나중에 다시는 볼 수 없는 경험이었다. 현대에 와서는 장례 풍습이 매우 간단하고 다양해졌으므로, 곡을 끊임없이 해야 했던 예전의 장례의식을 이해하기도 어렵고 아무도 따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하여간 그 방에서 나온 나는 나중에야 염을 한 시신이 그 방에 덩그러니 펼쳐져 있었던 병풍 뒤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 병풍 뒤에 누워 있을 시신이 그 곡 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자신의 죽음을 슬퍼함을 안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때 초상집에서 벌어진 장례 의식이었다.


어린 나는 그저 내가 시신이 있는 작은 방 안에 잠시라도 함께 머물렀다는 사실만 놀랍게 되새겼다. 그 생각을 하면서 약간 오싹하기까지 했다. 그 일을 두고, 서울에 와서 친구들 앞에서는 마치 내가 대단한 일이라도 했다는 듯이 적당히 포장하면서 그 경험을 전했다.


“너희들, 시골에서 장례식 어떻게 하는지 알아? 시신이 있는 방안에 들어가서 우는 거야. 눈물도 안 나는데 ‘아이고아이고’ 하면서 곡을 해야 하는 거야. 죽은 사람이 그 소리를 듣는다잖아. 방안에 병풍이 있는데, 그 뒤에 시신이 있다는 거야. 너네 시체와 그렇게 가깝게 있어 본 적 있어?”


서울 아이들은 잘 모른다.


초상집에서 죽은 자에게 애도를 표하기 위해 곡을 한다는 것도 모르고 시신을 나르는 상여를 직접 본 적도 없다. 초상집이 잔칫집처럼 시끌벅적하고, 염을 한 시신이 병풍 뒤에 누워있고, 그 앞에서 사람들이 눈물도 흘리지 않으면서 곡을 하고, 상여에 시신을 싣고 줄지어 가는 일들을.


그렇게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떠들썩하게 음식과 술을 먹고 마시는 잔치 아닌 잔치가 벌어진 후, 정오쯤이 되자 어디선가 큰 상여가 나타났다. 부산한 움직임 후에 동네 남성들은 모두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다. 그들은 약간 상의를 하더니 줄줄이 서서 상여를 메고 산으로 향했다.


그 행렬 맨 앞에서 누군가 종을 딸랑거리면서 큰 소리로 뭐라고 외쳤고, 상여를 메고 가는 남성들은 “어이여 뒤여”라면서 내가 알아듣지도 못하는 후렴을 합창하듯이 따라 했다. 처음 보는 아주 낯선 풍경이었다. 그날은 다행히 구름도 없는 맑은 하늘에 햇살이 밝고 따뜻했다. 바람도 잔잔하고 그리 춥지 않아서 상여를 메고 산에 오르기 좋은, 햇빛 환한 겨울 낮이었다.


긴 상여 행렬이 겨울 시골 마을을 천천히 가로질러 갔다. 상여는 말없이 밝게 내리쬐는 햇빛을 받아 환하게 빛났고, 고인이 필경 평생을 지냈을 마을에서 천천히 벗어났다. 말 그대로 “이제 가면 언제 오나”였다.


마을에서 산으로 향하는 길은 이윽고 넓은 도로에서 밭과 밭 사이 좁은 길로 이어졌고, 상여 행렬은 전진 속도가 갑자기 느려졌다. 행렬이 더 길게 늘어섰고 동네 아이들은 맨 끝에서 재잘거리면서 줄지어 따라갔다. 상여 행렬은 가파른 산으로 접어드는 곳에 이르러 멈춰 섰다. 행렬 앞에서 딸랑거리던 종소리는 진작에 멈췄고, 어른들이 외치던 후렴 소리도 모두 사라졌다. 산 아래 넓은 밭 좁은 길에 사람들은 많았지만 때때로 깊은 적막이 흘러 다니는 듯했다.


잠시 쉬고 나서 어른들은 다시 천천히 산으로 올라갔다. 아이들은 잠시 망설였다. 누군가 그렇게 하라고 지시했는지 아이들은 산으로는 올라가지 않고 뒤돌아섰다. 나는 웃고 떠들면서 신나게 마을로 뛰어가는 아이들을 부지런히 쫓아갔다. 그리고 그날 오후에도 여느 때처럼 나는 아이들과 함께 시냇가에서 썰매를 타면서 재미있게 놀았다.




5.


지경에서 산을 하나 넘어가면 괴실이라는 마을이 있었고, 그곳에 아버지의 작은 누나, 그러니까 나의 셋째 고모가 살고 계셨다. 아버지가 나를 시골에 두고 서울로 가신 다음, 나는 한동안 큰아버지 집에 머물렀다. 그렇게 열흘 정도 지난 후에 괴실 고모가 지경으로 와서 나를 데리고 산을 넘어 고모 집으로 갔다. 그 겨울에 괴실로 가기 위해 산을 넘는 것은 고모와 나에게 모두 매우 힘든 일이었다.


큰아버지 집에서 이른 저녁을 먹고 나서, 고모와 나는 길도 없어 보이는 눈 덮인 산길을 걸어갔다. 산을 넘는 길에는 낙엽과 눈이 잔뜩 쌓여 있었고 내 발은 자꾸만 미끄러지면서 그 속으로 푹푹 빠졌다. 허름한 내 운동화는 금세 눈에 젖었다. 신발 속으로 눈이 들어온 듯 발이 매우 차가워졌음을 느꼈다. 고모도 힘이 드는 듯 거친 숨을 내몰아 쉬었는데, 날은 이미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고모, 아직 한참 가야 해요?”

“아니, 이제 거의 다 왔어. 오래 안 걸려. 고개만 넘으면 돼.”

“눈이 너무 많아서 자꾸 미끄러지고 발이 깊이 빠져요.”

“눈이 생각보다 많이 쌓였네.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해.”


고모는 나에게 조심하라는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 힘들다고 중간에 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산을 넘어서 고모네 집으로 가는 동안 고모는 한 번도 내가 쉴 수 있는 여유를 주지 않았다. 고모는 빨리 가야지, 그렇지 않으면 날이 곧 어두워지고 더 추워진다고 했다. 나는 손발이 차가웠지만 부지런히 고모를 따라가느라 몸에서는 땀이 나고 덥다고 느꼈다.


고모가 금세 도착할 것처럼 오래 안 걸린다고 말한 후 나는 거의 30분도 넘게 걸은 듯했다. 고모네 집에 도착했을 때 날은 이미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눈만 없었다면 고모네 집으로 좀 더 빨리 갈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눈이 있어서 사방은 그리 어두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날 저녁 고모와 나는 눈 덮인 고개를 넘느라 한 시간도 훨씬 넘게 걸었던 듯하다. 고모도 나도 바쁘게 고개를 넘어오느라 매우 지치고 힘들었다. 내 몸은 땀에 젖었으나 발은 차갑게 젖어 있었다.


고모 집은 큰아버지 집처럼 방이 두 개 있는 초가집이지만 마당은 더 작았고 외양간도 없었다. 고모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부엌으로 가서 아궁이에 나뭇가지들을 잔뜩 집어넣고 불을 강하게 지폈다. 나는 고모 옆에 앉아서 탁탁거리면서 타는 나뭇가지를 바라보았다. 아궁이에서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고모는 아궁이 위에 있는 가마솥에 물을 데워서 내가 따뜻한 물로 씻도록 했다. 젖은 내 신발도 눈을 털고 방안에 들여놓아서 밤새 마를 수 있도록 해주었다. 밤에는 화로에 숯을 담아서 방 안으로 가지고 와서 방 안을 따뜻하게 했다.




방학 동안에 나는 큰아버지 집보다 고모 집에서 더 오래 머물렀다.


혼자 사시는 고모 집에서 머무는 동안 나는 이번에는 괴실 동네 아이들과 사귀었고, 그들과 매일 온종일 뛰어놀았다. 그 동네에는 지경에 비해 내 또래 아이들이 더 많은 듯했다. 나보다 나이 많은 형들과 또래 아이들이 여럿 있었는데, 그들은 서울에서 온 나에게 대체로 친근하게 잘 대해주었고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얼어붙은 논이나 작은 시내에서 썰매를 탔던 것이다.


그들은 나에게 날이 하나밖에 없는 썰매를 주었다. 그 썰매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균형을 잡지 못하고 곧잘 넘어졌다. 두 손에 나무 꼬챙이를 잡고 얼음 위를 짚어가면서 버티어야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 나무 꼬챙이는 끝에 못이 박혀 있지 않아서 그런지 얼음 위에서 잘 미끄러졌다. 그들은 그런 나를 보고 내 등을 밀어주기도 하고 얼음 위에서 균형을 잡도록 도와주기도 했다.


논은 넓지 않고 중간중간에 베고 남은 벼 밑동이 얼음 위로 솟아 있어서 썰매가 자주 걸렸다. 논보다 더 길고 재미있는 썰매 코스는 얼어붙은 시내였다. 괴실에 있는 시내는 지경에 있는 시내에 비해 좁고 가팔랐다. 정월 날씨가 매우 추워서 그런지 시냇물은 꽁꽁 얼어 있었다. 그 얼음물 위에서 썰매는 놀랄 만큼 빠르게 미끄러졌다. 그런 곳에서 나무 꼬챙이는 달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속도를 늦추고 멈추기 위해서 필요했다.


우리는 시내 상류로 걸어가서 줄지어 썰매를 타고 아래로 내려왔다. 그럴 때는 시내 중간에 툭 튀어나온 바위들을 조심해야 했다. 썰매를 타고 내려가다가 바위에 부딪치면 다칠 수도 있고 썰매가 부서질 수도 있었다. 시내가 심하게 꺾이는 곳도 있었다. 그런 데서는 거의 모두 넘어질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코트나 장갑도 없이 온종일 바깥에서 그렇게 뛰어놀면서 그 겨울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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