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시골 가는 길 - 마지막 인사 (3)

걷거나 타거나 (25)

by memory 최호인

6.


그렇게 시골에 한 달씩이나 머물렀던 것은 아마 초등학교 4학년 겨울방학 때까지였을 것이다.


확실한 것은, 6학년이 끝나고 중학생이 되던 겨울방학에 나는 시골에 가지 않았다. 아버지도 더 이상 나에게 시골에 가자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중학생이 된 후부터는 겨울방학에도 나는 교회에 가고 친구들 만나고 소설들을 읽고 공부한다고 해서 거의 하루도 할 일 없이 쉴 틈이 없었다.


나와 시골과의 관계는 그렇게 돌연히 마감되는 듯했다. 시골에 있는 큰아버지들과 고모들도 서울에 올라오는 일이 없었으므로 나는 그들을 볼 수 없었다. 괴실 고모만 아주 가끔 서울에 올라오셔서 사촌형 집이나 우리 집을 방문해서 겨우 반나절 또는 하룻밤 정도 볼 수 있었을 뿐이다.


내가 지경을 다시 방문한 것은 중고등학교 시절이 다 지나고, 대학에 입학하기 바로 전인 2월 말의 어느 한낮이었다.


아버지는 어엿한 대학생이 되는 내가 선산에 있는 할아버지와 다른 친척 어른들에게 인사드리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셨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으므로 시골을 방문하기로 했다. 나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었으므로 제법 의젓하게 보이기 위해서 셔츠와 재킷을 입고 갔다. 아버지와 나는 하루 만에 시골에 다녀올 작정이었으므로 청주를 생략한 채 지경으로 갔으며, 따라서 첫째 고모와 둘째 고모를 만날 수 없었다. 그들은 여전히 그곳에 그대로 살고 계셨을 것이다.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 지경에 있던 큰아버지는 연로해서 그런지 아파서 그런지 거동이 불편했던 듯하다. 아버지보다 나이가 일곱이나 여덟 정도 위였을 것으로 짐작되는 첫째 큰아버지는 여전히 하얀 한복을 입고 계셨으며 검게 그을린 얼굴에 스포츠머리 스타일을 하고 계셨다. 오랜 세월 한결같은 복장과 스타일이었다. 머리는 완전히 하얗게 세서 그의 구릿빛 피부가 더욱 어둡게 보였다.


내가 인사를 드리고 큰절을 드려도 큰아버지는 아랫목에 앉은 채 희미한 웃음만 지었을 뿐 거의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평생 그러셨던 듯하다. 큰아버지 몸이 불편해 보였으므로 아버지와 나는 그곳에서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작별 인사만 드리고 나와서 우리는 둘째 큰아버지 집으로 갔다.


첫째 큰아버지와 같이 평생 지경에서 농부로서 살았던 둘째 큰아버지는 첫째 큰아버지에 비해서 아버지와 나를 보고 더 환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말씀도 더 많이 하셨다. 장남과 차남의 차이일 것이다. 나도 장남인 형보다 내가 더 수다스러운 편이니까.


나는 시골에 갈 때마다 둘째 큰아버지를 보기는 했지만, 그분 집에서 잠을 잔 적이 없기 때문에, 어쩌면 아버지 형제자매 가운데 그분에 관해 가장 모르는 듯하다. 그분도 큰아버지처럼 하얀 한복을 입고 계셨으며 틈만 나면 곰방대를 입에 물고 계셨다. 아버지와 나는 큰아버지 집에 비해 약간 작은 그의 집 안방에 들어가서 점심도 아닌 저녁도 아닌 식사를 했다.


먼저 식사를 끝낸 나는 둘째 큰아버지와 아버지가 방에서 대화하고 계시는 동안 동네 한 바퀴 돌아보겠다고 말하고 밖으로 나왔다. 지경 마을을 본 것은 거의 10년 만이기 때문이다. 어릴 때 와서 놀던 동네 풍경을 보는 감회가 새로웠다. 시간이 어느새 그렇게 흘러갔던가.


시골 풍경은 별로 변한 것이 없었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길에는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한낮의 밝은 햇빛이 마을을 환하게 비추었지만 매우 적막하고 쓸쓸해 보였다. 어떤 집은 흙담이 허물어지고 있었고 어떤 집은 아예 빈집인 듯했다. 쉴 새 없이 발전하는 서울 모습과는 영 다른 정지된 화면과 같은 시골 모습이었다.


도로 옆으로는 여전히 맑은 시냇물이 자갈들을 헤치고 졸졸 소리를 내면서 흐르고 있었고, 시내 건너 인삼밭도 그대로였다. 마을 뒤에 있는 낮은 산과 헐벗어 앙상한 겨울나무들까지도.


그렇게 잠시 마을을 둘러보고 돌아왔을 때 둘째 큰아버지와 아버지는 마당에 나와서 서 계셨다. 딱히 오랫동안 나눌 이야기가 없었으므로 이별할 시간이 다가왔다. 나는 먼저 집 밖으로 나가서 도로에 서 있었고, 둘째 큰아버지와 아버지는 두런두런 대화하시면서 나오셨다. 닮은 듯 닮지 않은 형제모습이 묘하게 보였다. 염색을 하여 머리가 검고 양복을 입은 아버지는 둘째 큰아버지에 비해 한결 젊어 보이셨다.


둘째 큰아버지는 문 앞에 서서 긴 곰방대를 입에 물고 어색한 웃음을 지으면서 버스 정거장으로 걸어가는 아버지와 나를 한참동안 지켜보았다. 아버지는 조금 걷다가 뒤를 돌아보더니, "추우니까 어서 들어가세요."라고 외치면서 손을 내저었지만, 둘째 큰아버지는 곰방대를 입에 문 채 미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첫째 큰아버지와 둘째 큰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7.


첫째 큰아버지의 둘째 부인은……


훗날 나는 첫째 큰아버지와 여생을 함께 보냈던 여인에 대해서 이따금 생각해 보았다. 이상하게 그분의 얼굴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그분은 내가 큰아버지 집에서 머무를 때 아무 불평도 없이 나에게 밥을 챙겨주고 보살펴주었다. 큰아버지도 그렇지만 그분도 별로 말씀이 없는 분이었다. 내가 아는 한, 큰아버지의 첫째 부인과 노모, 즉 나의 친할머니가 서울로 떠난 후 큰아버지는 그 분과 지경에서 여생을 함께 살았다.


초등학생이었던 내가 지경에서 머물 때 그분을 뭐라고 불렀는지 모르겠다. 큰아버지의 첫 번째 부인은 내가 어릴 때도 또 나중에도 여전히 서울 신길동에 있는 큰 사촌형 집에 살고 계셨고, 나는 그녀를 “큰엄마”라고 호칭했다. 그분은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도 여러 차례 보아서 그런지 지금도 그분의 얼굴과 말투와 부지런한 움직임을 잘 기억한다. 그분은 나에게 친근한 모습으로 말씀도 많이 하셨고 언제나 뭔가 일을 하면서 부지런히 움직이셨다. 아들 부부를 도와서 손주들을 돌보고 가게도 보았으며 집 안 청소를 하고 식사 준비와 빨래도 하셨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큰엄마는 그저 아들들과 손주들을 위하는 순박한 분이었다.


지경에 있었던 큰아버지의 여인에게도 나는 아마 “큰엄마”라고 불렀을 것이다. 그것 이외에는 마땅히 부를 호칭이 없었으니까. 자주 거론할 일이 없었지만, 친척들이 큰아버지의 첩이라고 생각했던 그 여성을 생각할 때 나에게 인간적 연민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분이 큰아버지를 만나기에 앞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또 그 후로도 어떻게 살았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그녀에게 큰아버지를 만나기 전부터 아들이 하나 있었다는 말을 나중에 듣기는 했다.


그분은 전통사회에서, 신길동에 살았던 큰어머니와 함께 기구한 운명을 살았던 여성 가운데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돌연히 유부남과 정분이 나서 큰아버지와 살림을 차리고, 그의 조강지처나 마을 사람들로부터 수많은 손가락질을 당해야 했을 그분의 인생에 대해 내가 특별히 칭찬하거나 비난할 것은 없다. 큰아버지와 그분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는 없었던 듯하다.


그분은 큰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았을까.

그들이 살던 지경의 집은 그녀에게 넘어갔을까 아니면 큰 사촌형에게 상속됐을까.

집이야 어찌 됐든, 그녀의 아들이 있었으므로 보살핌을 받았을까.


큰아버지가 마땅히 졌어야 할 노모와 자녀들에 대한 경제적 책임감만 제외하고 생각한다면, 나는 큰아버지를 비난하고 싶지 않다. 큰아버지의 행동은, 요즘 말로 하면, 그 흔한 ‘이혼’과 ‘재혼’에 불과한 것이다. 이유는 모르지만, 그는 그냥 첫 번째 부인과 헤어지고 다른 여자를 찾아간 것에 불과하다. 요즘이라면, 그런 일을 두고 누구를 어떻게 비난하기나 할 수 있을까.


그런 문제를 전통사회의 관점으로 설명하자니, 남자가 조강지처를 버리고 첩을 들였다는 식으로 표현한다. 그것은 이혼과 재혼을, 또는 남녀의 만남과 이별과 새로운 만남을, 특히 그와 관련된 여성들을 비하하여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 가부장주의적이고 남성우위적 관점과 서술 방식에서 ‘조강지처’나 ‘첩’ 같은 단어가 사용되고, 남성 우선적이고 주도적인 가치판단이 적용되며, 여성은 남성에게 부속적이고 종속적인 삶인 것처럼 평가되고 왜곡되는 것이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여성의 경제력과 사회적 권리는 향상되었고, 우리가 전통적으로 이해해 왔던 가족제도는 급속하게 변화했다. 또는 붕괴하고 해체되어 왔다.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또 이제는 심지어 비혼 일인가구로 사회와 가족제도는 숨도 쉴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변했다. 많은 사람들이 전통과 관습에 젖어 결혼과 이혼에 관해 또 자식을 낳는 것에 관해 ‘마땅히’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자기가 속한 당대에 습득된 주류 가치체계에 불과하다.


지난 수십 년간 전통사회는 빠르게 해체되었고, 전통 의식은 격렬하게 전복되었으며, 주류 가치체계 역시 빠르게 바뀌었다. 그러한 사회문화적 변화를 미처 따라가지 못하고 적응하지 못할 때 겪는 개인의 심리적 불안을 사회학에서 ‘아노미’라고 한다. 자기가 알고 믿고 의지하고 있었던 가치관이 사회적 변화에 뒤처질 때 흔히 발생하는 현상이다.


그렇게 물질적인 사회환경 변화에 비해 정신적 적응이 늦어지는 것을 ‘문화 지체’라고 한다. 그것은 때때로 ‘소외’로 이해되기도 한다. 그것이 수많은 현대인의 병리학적 현상의 배경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지나치게 빠른 물질 변화를 겪어왔으므로 잠재적으로 정신병을 앓고 있기도 하다.


산업화 이전의 수백 년에 비해 산업화 이후의 수십 년 동안 이러한 가치체계의 전복은 더욱 격렬하게 진행됐다. 그러니 그 거세고 맹렬한 전복과 해체의 세월을 살아온 나 또한 오랫동안 여러 모로 심리적 아노미 내지 소외를 겪었다. 그러면서 사회적 가치관은 종잡을 수 없이 변했다.


그런 상황에서 결혼과 이혼과 재혼과 비혼 등 혼인과 자녀 출산 문제에 관해 딱히 뭐라고 주장하고 싶지 않다. 그 모든 것은 계속 변할 테니까.




8.


지경 마을을 떠나면서 생각했다.

여러 사건들이 벌어지기는 하지만, 인생은 대체로 지루하고 고달픈 것 같다고.

특히 시골은 더욱 그렇다고.


그날, 큰아버지들을 뵙고 인사드리는 것이 그분들에게 드리는 마지막 인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지나고 보니 그렇게 됐다.


오래전에 어린 내가 겨울 시냇가에서 함께 썰매를 탔던 사람들은 한 명도 보지 못했다. 나는 그들의 소식을 묻지도 않았다.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그들에게 나는 그들도 나처럼 어디선가 자기 몫을 하고 살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만 남겼다. 살면서 자기 몫이라도 제대로 하고 산다면 얼마나 다행인가.


지경 마을에는 예전과 달리 이미 전기가 들어와서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도 나오고 있었다. 밤에는 더 이상 호롱불을 밝히지 않고 형광등이나 전구를 켰을 것이다. 하루에 겨우 한 번 다녔던 버스도 더욱 자주 다니고 있었다. 10년도 안 되는 사이에 시골은 놀랍게 변화되었다.


그날 나는 어릴 때처럼 그곳에서 잠을 자지는 않았다. 마치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그날 오후에 나는 버스를 타고 서울로 돌아왔다. 어릴 때의 불편함을 어쩔 수 없이 참으면서 머무르지 않고 떠나도 될 만큼 나는 이미 커 있었고 큰아버지들과 고모들은 늙어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야 알게 됐다.

그때가 내 인생에서 나의 시골, 아버지의 고향인 괴산을 방문했던 마지막 시간이었음을.

또 두 분의 큰아버지를 보고 인사를 드렸던 마지막 시간이었음을.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시골 가는 길 - 마지막 인사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