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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와 인간 1

걷거나 타거나 (26)

by memory 최호인

1.


성남학교 뒷산 외에, 우리가 곧잘 원정을 떠났던 곳은 서쪽으로는 해군본부 정문 앞길을 지나 작은 계곡과 언덕을 넘어서 가야 했던 신길동, 남쪽으로는 대림동 삼거리, 그리고 지금은 보라매 공원이 된 공군사관학교 부근에 있는 연못 정도였다. 신길동에는 신길극장과 신길시장이 있었고, 대림동에는 대림극장이 있었다.


우리 동네는 노량진보다 남쪽에 있으므로 분명히 서울 변두리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당시 대방동은 해군본부와 공군본부와 공군사관학교가 있을 만큼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이었고 부유층도 많이 살았던 곳이다. 그래서 다시 벌어져서는 안 될 일이지만, 만약 또 전쟁이 나면 국방 지휘 본부들이 있는 대방동부터 먼저 폭격당할 것이라고 어른들이 말하곤 했었다.


공군사관학교 부근에 있는 연못에 갈 때 우리는 보통 서울공고 뒷길을 통해 갔는데, 당시에 그 아래 지역에는 논이 많았다. 농사를 전혀 모르는 나에게 논은 정겹기는 하지만 매우 낯선 풍경이었다. 나는 논에서 벼가 자라고 나중에 수확하면 우리의 주식인 쌀이 된다는 것 외에는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논에는 물이 낮게 차 있었고 푸른 벼가 자라고 있었다. 논과 논 사이에 있는 논두렁길은 폭이 매우 좁고 미끄러워서 우리는 그곳을 달려가다가 미끄러지곤 했다.


무더운 여름 오후, 동네에서 놀다가 지치면 우리는 때때로 공사 뒤에 있는 연못으로 가보았다. 우리 동네와는 이채로운 풍경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정수 형이 먼저 뛰어가고 우리가 부지런히 뒤따라갈 때 내 뒤에 오던 명이가 논두렁에서 급히 뛰어오다가 미끄러져서 논에 빠졌다. "으악"하는 비명소리와 함께 순식간이었다. 명이가 논으로 쑥 빠져드는 듯했다. 마침 논에는 물이 들어차 있었으므로 명이는 미끄러지면서 떨어져서 놀랐다기보다 어쩌면 차가운 물에 빠지면서 놀랐을 것이다. 우리는 아무도 감히 논으로 뛰어들어가지는 못한 채 명이에게 닿지도 않는 손을 뻗고서 "빨리 나와"라고 말하기만 했다.


명이는 처음에는 놀라서 아무 말도 못 하다가 우리의 손을 잡고 겨우 기어 나오더니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몹시 큰 소리로 엉엉 울었다. 그의 두 눈에서 방울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고 옷과 신발은 모두 젖었으며 진흙까지 잔뜩 묻었다. 명이는 연못이고 뭐고 그냥 집으로 가겠다고 했다. 뜨거운 햇빛에 금세 마를 거라고 우리가 말해줘도 명이가 막무가내로 울길래, 웬만하면 연못으로 가고 싶었던 우리는 낙담한 채 그냥 동네로 돌아왔다.


명이처럼 완전히 논에 빠진 적은 없지만, 나도 한 번은 논둑길로 뛰어가다가 미끄러져서 넘어진 적은 있었다. 그 바람에 엉덩이가 논둑에 닿았고 오른쪽 발이 논에 빠졌다. 운동화가 물에 젖고 두 손과 한쪽 다리와 바지에도 진흙이 묻었다. 그렇지만 나는 명이처럼 울지 않았고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지도 않았다. 나는 금세 일어나서 꿋꿋한 자세로 “괜찮아”라고 말했다. 여러 명이 같이 움직이고 있었으므로 그런 것쯤은 참고 가던 길을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동네 친구들이 함께 어울릴 때 그런 우발적 사고는 으레 발생하는 법이다. 그럴 때마다 개인적 사정을 내세워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면, 공동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남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개인보다 공동체를 내세우는 것도 옳지 않다. 개인은 모두 다른 사정을 가지고 있을 것이므로, 각자의 사정을 그대로 존중해 줄 필요가 있다. 공동체를 위한답시고 개인적 희생을 과도하게 요구하거나 강요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긴급하고 중대한 일이 아닌 바에야, 공동체는 저마다 겪는 개인적 사정도 배려하는 포용과 아량이 있어야 한다. 동네 아이들은 함께 어울려 놀면서 개인과 공동체의 그러한 관계를 이해하게 되고, 참을성과 협동심과 단결력을 자연스럽게 배우게 된다.



2.


아주 화창한 7월의 어느 오후였을 것이다.

우리는 여느 때처럼 동네에서 놀다가 연못으로 원정을 가기로 했다. 그곳은 동네에서 제법 멀고 시간이 걸리는 행사였으므로, 한 아이는 집에 가서 똥을 누고 가겠다고 했다. 나도 집으로 가서 오줌을 누고 물을 먹고 나왔다. 다른 아이들도 비슷한 이유로 우르르 각자 집으로 들어갔다가 나왔다. 늦게 나오는 아이들 때문에 그런 준비를 하는데도 보통 30분은 걸린다. 어떤 애는 아예 밥까지 먹고 나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약간 들뜬 기분으로 재잘거리면서, 서울공고 뒤를 지나서 미끄러운 논둑길을 통과했다. 지금은 보라매 공원이라고 부르는 공군사관학교 뒤에 있는 연못까지 가려면 30분 정도 걸어가야 했다. 약간 타원형인 그 연못의 지름은 아마 4,50미터 정도 되었을 것이다. 연못가에는 나무와 잡풀들이 있었고, 그곳을 벗어나면 또 논이 있었던 곳이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연못가에는 이미 아이들이 많이 있었다. 연못은 그 일대에서 꽤 유명한 곳이어서 그런지, 여러 동네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물이 얼마나 깨끗한지 알 수 없었고 투명하지도 않았으므로 물에 들어가서 수영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어떤 아이들은 신발을 벗고 물에 들어가기도 했다. 물에 들어가는 아이들은 바지를 적시지 않으려고 두 손으로 반바지를 더욱 추켜올리고, 허벅지가 물에 빠질 때까지 연못으로 들어갔다. 물이 흐려서 속은 보이지도 않고 얼마나 깊은지도 몰랐으므로 자칫하면 위험한 일이었지만, 아이들은 이미 익숙한 듯 연못에서 물을 튀기면서 돌아다녔다.


그러나 그런 아이들도 다리에 붙어 피를 빨아먹는 거머리를 무서워했다. 아이들이 물에 들어갔다가 나오면, 어느새 다리에 검은 거머리들이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다리에 딱 달라붙어서 징그럽기 그지없는 거머리를 겨우 떼어내면, 그 자리에는 어느새 붉은 핏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나 보였다. 그 핏자국을 보면서 나는 약간의 공포감을 느꼈고 그 다리가 내 다리가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물놀이를 좋아하지만 연못에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떤 아이들은 연못가에서 개구리를 잡아서 구워 먹기도 했다. 그 애들은 우리보다 나이가 많고 ‘시골스러워’ 보였다. ‘시골스럽다’는 표현을 기분 나쁘게 듣지 말기 바란다. 그냥 농촌 풍경이 전혀 없는 도시 마을에서 자란 우리와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는 말에 불과하며, 도시스러운 아이들보다 자연친화적 느낌을 준다는 말이다. 우리처럼 도시 주택가 골목에서만 놀면서 자란 아이들은 개구리나 메뚜기를 볼 일도 없었지만, 그런 것을 만지는 것은 더욱 징그러운 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도시스러운 아이들보다 시골스러운 아이들이 자연의 지혜를 더 잘 알고 용맹스러우며 추억할 거리도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개구리를 잡은 아이들은 연못가에서 개구리를 구워서 먹으려고 했다. 그 애들은 성냥과 종이까지 마련해 왔다. 우리 동네 아이들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는 온종일 돌아다니다가 배가 고플 때면, 겨우 학교 수돗가에 가서 물을 잔뜩 먹거나, 봉지에 든 생라면 하나에 가루 스를 뿌려서 나눠 먹거나, 아카시아 꽃을 따서 먹었을 뿐이다. 메뚜기나 개구리를 구워 먹는 것은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하여간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메뚜기나 개구리 뒷다리를 구워서 먹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사건이다. 그날 연못가에서 어린 나로서는 대단히 충격적인 광경을 보았다. 그것은 개구리에 관해 내가 보았던, 다소 무섭기도 하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우스꽝스럽기도 한 이야기다.



3.


당신도 그런 적이 있을 것이다. 왜 그러는지 모르지만, 사람들은 호수나 강 같은 물가에 가면 돌을 주워서 던진다. 그것은 어찌 보면, 눈에 뻔히 보이는 물이 정말로 거기 있는지 확인하는 것 같기도 하고, 또는 돌이 정말로 물에 빠지는지 확인하는 것 같기도 하다.


우리도 그랬다.

다른 아이들이 그러는 것처럼, 마치 연못에 왔다는 신고식이라도 하듯이, 우리는 가능하면 납작한 돌을 찾아서 연못 물 위로 던졌다. 땅과 평행하게 잘만 던지면, 돌이 물 위에서 통통 튀면서 날아가는 놀이는 누구나 해보았을 것이다. 잘 던지는 사람은 돌멩이가 물 위에서 열 번 이상도 튀면서 날아갔다. 자신이 던진 돌이 물 위에서 많이 튀면 사람들은 마치 대단한 일이라도 해낸 듯 굉장히 좋아한다. 옆에서 그런 모습을 보면 약간 우스워 보이지만, 그것은 아이뿐 아니라 성인이라 해도 대체로 마찬가지다.


하긴, 그것도 실력이다.

누가 물 위에서 돌이 더 많이 튀게 할 수 있는가 시합을 하면 실력 차이가 난다. 잘 던지는 아이는 항상 잘 던지고, 못 던지는 아이는 항상 못 던진다. 그런 일은 거의 언제나 비슷하게 발생해서, 마치 인생의 불합리한 원리와도 같다. 내 말은, 뭐를 하든 잘하는 놈은 웬만해선 뒤로 처지지 않고 계속 잘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국민교육헌장'에도 나오는 것처럼, 아무리 저마다 다른 소질이 있다고 말하기는 해도, 실제로는 저마다 소질을 잘 찾아서 계발하거나 그 소질을 바탕으로 성공하기는 쉽지 않다. 다시 말해서, 결국 세상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매우 불평등하다고 말하는 것이 전혀 틀렸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러니까 그냥 저마다 소질이 있으므로 그것을 계발하면 모두 평등한 것처럼 말하지 말고, 실은 어떤 소질은 우리 사회에 별로 쓸모가 없고, 아예 어떤 소질도 계발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해서, 오늘날 쓸모없는 소질을 가지고 있거나 아예 남다른 소질이 없다고 해서 손가락질당하거나 그들이 받는 부당한 대우를 당연하게 여기지 말고, 소질 여부와 상관없이 모두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사회가 제도적으로 역할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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