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한 달 살기 10월 21일 (2)
3. 조금 더 친절하면 좋을 텐데
이날 저녁, 부산역 앞에 있는 차이나타운으로 가기 위해 삼락생태공원에서 나와서 사상역으로 갈 때의 이야기다. 나는 사상역으로 가서 지하철을 타고 부산역으로 가고자 했다.
친절이 필요할 때는 언제인가.
한국인들은 언제 누구에게 친절한가.
삼락생태공원에서 서둘러 나가면서 축제를 위해 일하는 한 스태프에게 물었다. 여기서 부산역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요? 그러자 그는 나에게 사상역으로 걸어가서 지하철을 타라고 했다. 공원에서 남쪽으로 멀리 내다보면,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부산-김해 경전철 철로가 있었는데, 그곳으로 가면 공원과 시내 사이에 있는 작은 하천과 차도 등을 모두 가로질러 갈 수 있다고 했다.
그의 말대로 갔더니 공원 위로 경전철 고가도로로 올라갈 수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사상역을 향해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상역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으므로, 사상구 대로를 지나가면서 나는 수차례 더 사상역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냐고 행인들에게 물었다. 그들의 대답은 거의 비슷했다.
“저쪽으로 쭈욱 가면 돼요.” 또는 그냥 “저쪽으로 가요.” 또는 그냥 손만 들어서 방향만 가리켰다.
쭈욱 가라는 말을 나는 직선으로 뻗은 넓은 도로를 따라가라는 말로 듣고 힘차게 걸었다. 한참을 걸어도 사상역이 나오지 않았으므로 나는 또 행인에게 물었다.
“사상역이 어디에 있나요?”
대답은 다시 “이쪽으로 쭈욱 가면 돼요”였다. 그렇게 전진했을 때 이윽고 사상역이 나왔다. 그런데 그것은 조금 전에 보았던 부산-김해 경전철을 위한 사상역이었다.
어 이게 뭐야.
나는 서면역으로 가는 2호선 지하철을 타야 하는데…
지하철을 위한 다른 사상역이 있다고 판단한 나는 또 행인에게 물었다.
“사상역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죠?”
대답은 한결같았다. “저쪽으로 쭈욱 가세요.”
나는 대로를 따라서 계속 걸었다. 걷다 보니 대로가 끝나는 지점에 이른 듯한데, 이미 어두워진 하늘을 배경으로 드디어 ‘사상역’이 네온으로 빛나는 것이 보였다. 드디어 도착했군, 이라고 탄식하면서 역내로 들어가는데 이상하게 매우 한산했다. 알고 보니, 그곳은 무궁화호 열차가 서는 사상역이었다.
에이 이런~~.
내 입에서 한숨과 욕이 저절로 섞여 나왔다.
그 역에서 화장실만 들렀다가 나온 나는 지금까지 왔던 길을 되돌아오면서 또 행인에게 물었다.
“지하철 2호선 사상역이 어디에 있죠?”
“이쪽으로 쭈욱 가요.”
대답은 모두 똑같았다. 다만, 이번에는 반대쪽으로. 그들은 먼저, 왜 나에게 묻느냐는 표정을 짓고, 두 번째로 대답하기가 귀찮다는 듯 “저쪽으로 쭈욱”이었다. 어떻게 사람들이 모두 똑같이 그럴 수 있을까. 놀라운 일이었다.
오래전, 내가 미국에 간 지 얼마 안 돼서 영어 거의 못할 때였다. 질문을 해도 미국인이 잘 알아듣지 못하고, 그들이 대답해도 내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할 때였다. 맨해튼 타임스스퀘어 지하철 역은 서울의 잠실역보다 작을지 모르지만 매우 넓고 복잡한 곳이며 여러 개의 지하철 노선이 겹치는 곳이다.
맨해튼 뉴요커들은 한국인들 못지않게 빠르게 걷는다. 내가 그곳에서 원하는 전철을 찾지 못해서 헤매고 있을 때 한 백인여성이 나에게 가는 길을 알려주었는데, 내가 잘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자 그녀는 아예 내가 원하는 전철을 타는 곳까지 나를 데리고 가 주었다. 나는 처음으로 미국인의 친절을 제대로 인정했다.
아, 이렇게 친절한 사람도 있구나.
지금도 뉴욕에서 행인들에게 길을 물으면 열 명 중 절반 정도는 꽤 친절하게 대답해 준다. 그리고 그 대답은 대체로 매우 구체적이다. 이 방향으로 세 블록 가서 왼쪽으로 돌아서 두 블록 더 가면 됩니다,라는 식이다. 또는 이쪽으로 80미터 정도 가면 어떤 가게가 나오는데, 그 가게에서 오른쪽으로 돌아서 한 블록만 가면 된다,라는 식이다. (물론 그곳에도 대답도 하지 않거나 대답한다 해도 성의 없게 하는 사람이 왜 없겠는가.)
어젯밤에 나도 그랬다.
피곤한 몸이 되어서 숙소 건물로 들어오던 나는 건물 입구에 있는 편의점에서 1+1이라고 적힌 것을 보고 작은 물병을 네 개나 샀다. 매일 가방에 한 병씩 가지고 나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로 가는데, 편의점에 들어가기 전부터 프런트데스크에서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두 여성이, 내가 편의점에서 나온 후까지도 여전히 핸드폰을 보면서 서로 뭔가 논의하고 있었다. 편의점은 건물 입구로 들어가서 왼쪽에 출입문이 있었고, 프런트데스크는 복도로 조금 더 가야 있었으며, 엘리베이터는 그 프런트데스크를 지나자마자 오른쪽으로 돌아서 있었다.
프런트데스크 앞에 서서 열심히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그들 옆으로 갔을 때 나는 그들이 뭔가 도움이 필요하다고 짐작했다.
“도와드릴까요?”
물병 네 개를 가슴에 든 채 말하는 나를 보고 그들이 나의 말에 반갑게 대답했다.
“네. 숙소를 찾아왔는데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내가 이렇게 대화 내용을 한국말로 적어놓았지만 그들은 중국에서 온 젊은 여성들이었고 영어로 말했다. 마치 홍콩에서 온 듯 그들 중 한 명은 영어를 능숙하게 했다. 숙소를 알려주는 ‘매니저’들은 오후 8시에 이미 자리를 떴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이 숙소는 ‘Urban Stay’이고 비대면 예약제 방식으로 입실할 수 있다. 이 건물에 들어오려는 손님은 인터넷이나 전화로 예약하고 텍스트 메시지로 방 번호와 비밀번호를 받는다. 그런데 이 여성들은 예약만 했지, 방 번호조차 알지 못했다.
나는 그들이 핸드폰에서 보여주는 전화번호로 전화를 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그들이 한국말을 하지 못하고 누구에게 물어야 할지 몰랐으므로 나는 마침 엘리베이터에서 나와서 지나가는, 건물을 청소하는 사람을 찾아서 방 예약에 관해 물었다. 그는 지하 1층으로 내려가서 매니저를 찾아보고, 매니저가 안 보이면 방문을 두드리라고 말했다. 나는 그 여성들과 함께 지하실로 내려갔다. 내 손에는 여전히 편의점 냉장고에서 꺼낸 차가운 물병 네 개가 들려 있었다.
지하실에는 물품 보관함들이 있었는데 그 한쪽 구석에서 한 남자가 나왔다. 다행히 그는 숙박 관련 매니저였다. 나는 그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그리고 드디어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하고 그 자리를 떠나고자 했다. 여성들이 나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했고 나는 엘리베이터 앞으로 가서 섰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건물에는 여러 숙박 매니저들이 있는데, 그는 그 여성들의 예약을 취급하지 않아서 도와줄 수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다시 돌아와서 그에게 물었다.
그럼 이 여성들은 어떻게 방으로 들어갈 수 있냐고?
그는 약간 당황한 채 돌아서더니, 마치 창고인 듯 보이는 곳 안에 있는 방으로 가서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다른 남성이 나왔다. 그는 또 다른 숙박 매니저였다. 이 건물에는 여러 매니저들이 영업을 하고 있어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새로 나온 매니저는 원래의 일과가 끝나서 방으로 들어갔겠지만, 이렇게 밤늦게 오는 숙박객들은 그런 게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다행히 이번 매니저는 그 여성들의 예약을 담당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비로소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하고 진짜로 떠나려 했다. 그래도 미심쩍은 마음이 남아서 그 여성에게 내 전화번호를 주었다. “문제가 생기거나 한국말 대화가 필요하면 나에게 전화하세요.”라고 말하면서. 내 경험에 비춰볼 때, 그들에게 나는 한 개인이 아니라, 한국을 대표하는 사람처럼 보이기 마련이다. 이런 어려움을 당했을 때 그들이 만나는 한국인이 외면하는지 아니면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지에 따라 그들이 한국과 한국인들에게 갖는 인상이 결정되거나 오래 남기 마련이다.
내가 떠나기 전에 그 여성은 환하게 웃으면서 나에게 몇 번이나 고맙다고 대답했다. 나는 겨우 5분 정도 찬 물병들을 가슴에 안은 채 수고했을 뿐이지만, 그들에게는 그것이 큰 고마움일 수 있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었으므로 마음이 뿌듯했다. 그들은 결국 어젯밤에 방을 잘 찾아 들어갔던 모양이다. 오늘 아침에 내 전화로 텍스트 메시지가 들어왔다.
“Dear Sir, thank you for your kind help last night. Nice to meet you. Have a good time in Busan. I wish you good health and happiness everyday.” (어젯밤에 도와줘서 고마웠습니다. 부산여행을 잘 즐기시고 부디 건강하고 행복하기 바랍니다.)
메시지를 보니, 아침부터 괜히 기분이 좋았다. 나는 그들이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 좋은 첫인상을 가지게 되기를 바랐다.
그런데 오늘 사상역을 찾아가는 나의 현실은 아주 불쌍하게도 이 모양이었다.
“저쪽으로 쭈욱 가세요.”라는 말을 듣고 나는 계속 걸었는데, 여전히 내가 원하는 2호선 사상역 입구는 보이지 않았다. 공원에서 나온 후에 무려 대여섯 명에게 물어본 후였다. 이상하게 오늘은 카카오맵보다 사람의 말에 의존하고자 했던 나의 잘못도 있었다. 그런데 카카오맵도 애초에 공원에서부터 계속 뭔가 엉뚱한 지시를 내렸으므로 내가 행인들에게 길을 물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그곳 사정은 현지인들이 가장 잘 알 테니까.
그래도 지하철 사상역을 찾을 수 없어서 나는 젊은 커플에게 또 물었다.
“지하철 2호선 입구가 어디에 있죠?”
내 질문은 정확히 지하철 2호선이었다. 더 이상 ‘사상역’이 아니었다. (이 긴 거리에 같은 이름의 사상역은 3개나 있었다. 2호선 지하철 외에 부산-김해 경전철, 무궁화호 열차역 등. 아니, 왜 이렇게 만들어놓은 것이야.ㅠㅠ)
‘저쪽 안으로 가서 왼쪽으로 가면 됩니다.”라고 젊은 남자가 말했다.
그 길은 대로에서 왼쪽으로 들어가서 다시 또 왼쪽으로 돌아야 하는 곳이었다. 결국 나는 지하철 입구를 찾았다.
원래는 공원에서 나오면서 20여 분 내로 지하철 사상역에 들어왔어야 하는데, 결국 한 시간이나 걸렸다. 그 바람에 오늘 나는 어제보다 1천 걸음 이상 더 걸었다.
사상역을 찾는 데 있어서, 내가 모자란 점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한국인들의 친절 수준을 이해할 만했다. 이들은 타 지역 사람이나 외국인에게 결코 매우 친절하다고는 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적어도 내가 미국이나 유럽에서 겪었던 친절 수준에 비할 때 그렇다는 것이다. 만약 점수로 따지자면, 내가 볼 때 다른 선진국 사람들을 뭉뚱그려서 90점으로 할 때 한국인의 점수는 75점 정도.
만약 내가 예쁜 여성이나 잘생긴 백인 남성이었다면 사정은 달라졌을지 모른다. 이미 어둠이 내려앉은 사상구 거리에서, 더욱이 나는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있었으므로 갑자기 질문을 하는 나를 경계해서 그곳 사람들이 그렇게 불친절하게 대답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아쉽고 안타까운 일이다.
대낮에 서울에서도 나는 비슷한 경험을 했었다. 그런 것들은 한국인의 친절 수준을 알려주는 지표다. 한국인들이 외국인을 대할 때 백인에게는 친절하지만 유색 인종에게는 백인에게 대하는 것만큼 친절하지 않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한국인들은 기본적으로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서 '차별'이 심한 편이다.
덧붙여 ‘지적’하자면, 한국인의 말은 구체적이지 않을 때가 많다. 미국인들도 대답할 때 “이쪽으로 쭈욱”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거기에는 보통 거리 수치가 따른다. 길을 쭉 따라가서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이면 간단하지만, 그렇게 가다가 쉽게 찾기 어렵거나 좌우로 난 길로 돌아야 한다면 어느 지점에서 방향을 바꿔야 한다고 말해준다. 그런데 한국인의 말은 대체로 그런 구체성을 결여할 때가 많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얼굴 표정에서도 묻는 사람에게 결코 친절하다는 인상을 주지 않는다. 낯선 사람에게 웃는 표정을 지으면 안 된다는 일종의 합의가 있는 듯한 사회다.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한국인들의 얼굴에는 웃거나 다정한 표정이 거의 없다. 특히 젊은 사람들에게 그런 경향이 심하다. 그들은 가능하면 아주 도도하고 냉랭한 표정으로 최대한 짧게 대답한다.
오늘날 한국을 찾는 외국인 방문객은 연간 1천만 명에 이른다. 해외로 나가는 한국인은 더 많다. 외국으로 나가는 한국인 여행객들은 낯선 거리에 가면 거의 모두 오늘 내가 ‘사상역’을 묻는 것처럼 길을 찾는 질문을 할 것이다. 그럴 때 상대방이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서 그 나라와 그 국가 사람들에 대한 인상이 달라진다.
그럴 때는 묻는 사람도 대답하는 사람도 누구나 ‘국가 대표’가 되기 때문이다.
나는 부디 한국인들이 누구에게나 더욱 친절해지기를 바란다. 다시 말하지만, ‘누구에게나’ 말이다. 싸우자고 덤벼드는 사람이 아닌 누구에게나 말이다. 누군가 길을 물어볼 때 그들이 느낄 불안과 불편과 난처함에 공감능력을 갖기를 바란다. 그런 것이 잘 작동될 때 서로 살기가 편해지고, 한국인에 대한 호감도 올라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