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한 달기 10월 20일 (2)
3. 삼광사
부산의 3대 사찰은 범어사, 삼광사, 해동용궁사로 알려져 있다.
범어사(신라 문무왕 18년, 678년)나 해동용궁사(고려 우왕 2년, 1376년)는 역사가 무척 오래되었지만, 삼광사는 1986년에 건설된 사찰이다. 그런데도 삼광사가 이렇게 유명해진 것은 이 사찰이 어마어마하게 큰 규모로 지어졌고 매우 화려한 외관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이 사찰이 1986년에 지어졌다고 나오지만, 그곳에 가보니 창건 54주년이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어느 것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54주년이면 1969년이 창건 해라는 말이다.)
삼광사는 내가 지금까지 한국에서 본 사찰들 가운데 가장 집약적이고 현대적이고 화려하다. 집약적이라고 하는 것은 사찰 건물들이 매우 밀집되어 가깝게 지어졌다는 의미이고, 현대적이라는 것은 사찰 건물의 크기가 엄청나게 클 뿐 아니라 사찰로서는 처음 보는 다층 건물이라는 의미이며, 화려하다는 것은 지극히 거창하고 멋있게 꾸며놓았다는 의미이다.
이 사찰의 입구까지 마을버스가 가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부산시민공원부터 삼광사까지 40분 정도 걸어갔다. 미처 알지 못하고 기대하지 않았던 문제는 이 사찰이 산에 있었다는 것이다. 사찰이라면 으레 산에 있을 법도 한데, 부산 지리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카카오맵에서 거리와 걷는 데 걸리는 시간만 조사했으므로 삼광사가 산 위에 있다는 것을 예상하지 않았다. 결국 오르막길을 가야 했는데, 나는 낑낑대면서 부산 시내에 역시 산이 많다는 사실을 다시 깨달았다.
가다 보니 좁은 길들을 자주 만나서 몇 차례나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 드디어 도착한 삼광사 입구에는 마치 군사적 성채 또는 요새의 입구인 듯 보이는 높다란 일주문이 있었다. 가파른 길에 있는 일주문에 이르러서 보니 다시 그 안으로 엄청난 규모의 계단이 보인다. 아, 마치 고단한 삶처럼 가도 가도 또 올라가야 하는 묘한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높은 계단 위에 웅장한 사찰 건물이 보였다. 거의 아찔하게 높은 곳으로 보였다.
나는 걷느라고 헉헉거리면서 그 긴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는데 십여 개 정도 올라갔을 때 문득 깨달았다.
이 계단은 필경 108개의 계단일 것이라고!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계단 밑으로 내려갔다. 이번에는 계단의 숫자를 세면서 오르기 시작했다. 아마도 계단을 하나씩 밟을 때마다 속세의 번뇌를 헤아려야 했지만 나는 그저 헉헉거리면서 힘들다는 생각만 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편에서는 속세의 번뇌가 108가지나 되나? 하는 생각도 했다. 그 많은 번뇌 중 내가 가진 번뇌는 어떤 것들일까.
그렇게 정말로 108개나 되는 계단을 올랐을 때 넓은 광장이 나왔으며, 그 뒤에 다시 높은 계단이 이어졌고 그 위에 높은 건물들이 빙 둘러서 서 있었다. 그 건물들은 다른 사찰에서는 보기 힘들 정도로 높고 크고 화려했다. 계단들에는 수많은 노란 국화들이 늘어서서 아름답게 보였다. 그 사찰 건물들 가운데 가장 높은 것은 아마 6층인 듯했다. 그렇게 높은 건물이 있었으므로 삼광사는 다른 사찰들과는 매우 다른 느낌을 주었다.
삼광사는 한국 불교에서는 천태종 계열로 본산인 구인사 다음으로 큰 사찰이다. 한국의 주류 불교는 조계종이고 본산은 서울 종로에 있는 조계사이다. 천태종은 고려시대 대각국사 의천에 의해 창건되었지만 조선시대 세종 시절에 실시된 억불정책에 따라 선종에 폐합됐다. 그렇게 명맥이 끊어졌던 천태종은 1996년 상월 스님이 단양 구인사에 종단을 조직하고 전파를 개시했다.
구인사는 규모가 삼광사에 비해 훨씬 크지만, 삼광사는 부산 시내에 있어서 접근성이 우수하다. 그로 인해 이 사찰의 신도는 금세기 초에 이미 33만 명에 이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나는 사찰의 신도를 집계하는 방법을 모른다. 확실한 것은 한국의 종교 신도에 관한 통계가 늘 과장되어 발표된다는 것이다. 또한 유난히 정기출석을 강조하는 기독교의 교인들과 달리, 불교에서는 연중 겨우 몇 차례 정도만 사찰에 오는 신도가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삼광사가 웅장하고 넓다고는 하나 한꺼번에 수만 명이 들어설 자리를 만들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좁은 나라에서 하나의 종교시설에 신도 수가 수십만을 헤아리는 것은 대단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권력과 금전이 집중되는 곳에는 늘 유혹과 갈등이 따르는 법이다. 일부 거대 기독교회가 곧잘 세속적인 유혹에 시달리고 담임목사 자리를 두고 부자 세습 갈등이 벌어지며 그를 둘러싼 교인들간 암투가 발생하는 상황에서 삼광사 같은 거대 사찰은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조계종이 사찰에 대한 개별 사유제를 허용하는 데 반해 천태종은 중앙집권제이다. 천태종은 신도들이 직접 운영하여 재정관리가 비교적 투명하다고 한다. 이들은 또한 주로 도시 근교에 사찰을 건설하고 24시간 개방하며, 비구니가 머리를 깎지 않는다는 특징도 있다.
삼광사는 해마다 5월에 연등 축제가 열리는데 이때 신도들이 사찰로 몰려들어 인근 초읍동과 연지동은 수많은 인파로 북적거린다고 한다. 초읍초등학교와 연지초등학교는 내가 힘들게 걸어온 언덕길 아파트 단지 사이에서 보았던 초등학교들이다. 그래서 이름을 쉽게 기억할 수 있었다.
미국의 CNN이 선정한 한국의 아름다운 50선 가운데 삼광사를 포함시킴으로써 이 사찰은 더욱 유명해졌다. 삼광사는 실제로 대단히 아름다우며 일부러 찾아와서 볼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언덕 위에 있는 사찰에서 건너편 언덕의 초가을 풍경을 보는 것도 멋이 있었다. 삼광사 곳곳을 둘러보고 나서 나올 때는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마을버스를 타고 편하게 서면역까지 올 수 있었다.
4. 부산대와 라라라 페스티벌
서면역에 도착하여 마을버스에서 내린 즉시 나는 숙소로 돌아가지 않고 곧바로 부산대로 향했다. 부산대도 보고 라라라 페스티벌도 보고 싶었다. 부산대역 아래에서 한다는 페스티벌 장소를 찾을 수 없었던 나는 일단 부산대로 향했다. 부산대는 지하철 부산대역에서 10분 정도 걸어 들어간다. 그곳으로 가는 길들에는 대학가답게 수많은 상점들이 영업을 하고 있었으며 길거리에는 대학생들과 젊은이들이 무척 많았다. 부산에 와서 오랜만에 보는 젊은이들의 물결이었다.
부산대 정문은 다른 대학과 매우 달라 보인다. 이 대학은 정문에 이르러 약간 오르막길로 들어가게 되어 있는데 (그러니까 대학이 산에 있다는 것인데!), 금요일 오후인데도 많은 학생들이 캠퍼스와 정문을 오가고 있었다. 마치 새로 지은 아파트 건물 지하실에 주차장이 있는 것처럼, 부산대 정문 가운데 길은 차도이다. 이 도로는 정문으로 들어가서 마주하는 캠퍼스 아래로 들어가고 있었고 캠퍼스로 걸어서 들어가는 도로는 차도 양편에 있었다. 그 양쪽 도로가 오르막길로 되어 있어서 차도는 그냥 대학교 1층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꾸며진 특징을 가지고 있다.
입구를 지나서 오르막길로 올라보니 캠퍼스에 넓은 광장이 나왔다. 거기에는 농구대도 여러 개가 있어서 이미 어두워진 가운데서도 조명 아래서 학생들이 신나게 소리를 지르면서 농구를 하고 있었다. 부산에 와서, 특히 서면에서, 삶에 찌들고 가난해 보이고 아픈 노인들을 많이 보다가, 부산대 교정애서 활기찬 대학생들의 얼굴을 보니 괜스레 옛 생각이 떠오르고 기분이 좋아졌다.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도 저랬던가?
교정은 이미 어둑해져 있었고 이미 오랜 걸음으로 피곤해진 나는 굳이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어둠 가운데 높은 대학 건물들이 광장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서 있었다. 이 광장은 현재 ‘10월 광장’으로 불린다. 1979년 10월에 부마민중항쟁을 촉발시킨 시위가 바로 그 광장에서 시작됐기 때문이다.
부산대는 10.16 부마민중항쟁 44주년을 맞아 올해 10월 11일부터 17일까지 기념주간으로 정하고 다양한 행사를 펼쳤다고 한다. 부산대는 대한민국의 민주화 항쟁을 선도했다는 자부심이 대단한 것처럼 보였다.
대학생들의 활기찬 모습을 가슴에 담고 나는 파김치 같은 몸이 되어 다시 부산대역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버거킹에서 샌드위치를 먹고 에너지를 보충했다. 부산대역에 도착했을 때 3번 출구 아래로 돌연히 ‘라라라 페스티벌’ 현수막이 보였다. 가까이 가서 보니 전철 아래로 하천이 흐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상인들에게 물어보니, 그 하천은 온천천이라고 한다. 온천천은 부산 금정산에서 발원하여 동래구, 연제구를 거쳐 수영강으로 흘러가는 지방 하천이다. 그 하천을 보는 즉시 나는 서울 청계천 수로를 떠올렸다. 어두워서 그런지 언뜻 보면 비슷해 보인다. 수량이 많고 유속이 빠르기 때문이다.
서울에서도 지방에서도 여러 하천을 보았지만 유속이 빠른 곳은 별로 없었다. 더욱이 부산대 앞의 하천은 거의 도시 내에서 만들어진 수로처럼 보였으므로, 나는 처음에는 혹시 이 수로도 인공적으로 물을 퍼올려서 흘려 내리는지 궁금했다. 페스티벌 쓰레기를 정리하는 아주머니 직원들에게 물어보니까, 그렇지 않다고 했다. 온천천 물은 “인공 아니라예. 이 물은 저 위에 범어사에서부터 내려오는 물이라예. 그런데 홍수만 나면 물이 예까지 넘치는기라.”
수로 폭이 좁아서 그런지 홍수만 나면 물이 수로 밖으로 넘쳐흐른다는 것이다. 그래도 전철과 차도와 인도는 그 위에 있어서 괜찮을 것 같았다. 그 수로 옆에 라라리 페스티벌에 참여한 천막 상점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작은 천막 부스들을 수로 양쪽에 설치해서 한쪽은 주로 먹거리를, 다른 곳은 공예품 같은 것을 판매하고 있었다. 하얀 부스들 위에는 노랑 불빛이 환하게 빛났다.
나는 혹시 먹을 것이 있을까 살펴보았다. 각 부스에는 쿠키며 떡이며 빵들이 맛있어 보이기는 하지만 가격이 비싸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도 부스마다 활기찬 젊은이들이 먹거리를 팔고 있어서 그들을 보는 느낌은 좋았다. 역시 젊음은 좋은 것이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
젊음이 좋기는 하지만, 이미 나의 시간은 흘러갔다. 나는 지치고 아픈 몸을 겨우겨우 이끌고 걷고 있다. 걸어 다니는 게 기적이라는 생각까지 하면서.
젊음을 되찾기 위해서 과욕을 부리면 안 된다는 것을 다시 생각한다. 젊음이 좋다고 해서 그것을 어떻게 해서든지 되찾으려는, 나이 든 사람들의 지나친 노력은 꼴불견이 되기 십상이다. 흘러간 시간을 흘러간 대로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나이 든 사람들이 택할 수 있는 전략은…
설사 육체적으로는 젊은이들을 따라가지 못한다 해도 뭔가 끊임없이 익히고 배우면서 창의성을 발휘하려는 정신적 젊음을 찾는 것이 되어야 한다. 나이가 들어서 얼굴과 피부와 신체가 변하는 것이야 어찌할까. 그래도 요즘 노인들은 과거에 비해 오래 살고 젊게 산다는 것에 만족할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