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한 달 살기 10월 19일 (2)
3. 중고서점에서 다시 생각하는 빅뱅
늦은 오후, 피부과에서 나와서 그냥 숙소로 돌아가기는 너무 일러서 고민했는데, 뜻밖에 서면 지하상가에서 예스24 중고서점을 발견했다. 나는 자연히 서점으로 들어갔다. 며칠 전에 갔었던 보수동 헌책방 거리에서 찾지 못했던 ‘문고판’ 책을 찾을 수 있을까 기대하면서.
그런데 이 중고서점은 실망스럽게 작다. 언뜻 둘러봐도 책이 별로 없다.
그래도 들어간 김에 휘 둘러보다가 나는 어느덧 자연과학 코너에서 눈길이 가는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우주물리학 전문가는 아니지만 관심이 많은 아마추어 연구자가 쓴 책이다. 아마추어라면서 우주물리학에 얼마나 관심이 많으면 책까지 썼을까 싶었다.
나도 오래전에 우주물리학에 관심을 가지고 살펴봤던 입장에서 그의 책이 재미있다 싶어서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숙소로 돌아오면서 어느새 책 제목과 지은이 이름까지 잊어버린, 우주물리학에 관해 그가 쓴 책의 내용은 간단히 말하면 이렇다.
우리 우주는 아주 거대한 블랙홀의 핵심에 갇혀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현대 우주물리학이 우리의 궁금증에 대답하지 못하는 문제들이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빅뱅에 관한 것이다. 빅뱅은 아직까지 우주물리학자들이 반박하기 어려운 내용이지만 쉽게 이해되지도 않고 뭔가 밑도 끝도 없는 내용이기도 하다. 그러니 기독교인들까지, 일부이기는 하겠지만, 빅뱅이론을 성경의 창세기, 즉 하나님의 우주 창조설에 부합하는 이론이라고 추켜세우기도 한다.
빅뱅이 인정되는 이유는 관측 결과 우주가 팽창하기 때문이다. 우주가 팽창한다는 것은 지난 세기 초에 허블 망원경에 의해 확인됐다. 허블 망원경으로 관측해 보니까 먼 은하가 더 멀어지는 적생편이현상이 발견되어서 우주가 팽창된다는 주장이 증명된 것이다.
적색편이는 도플러 효과를 말한다. 이 효과는 이를테면 우리에게 다가오는 불자동차의 사이렌 소리는 더 커지고, 멀어지는 불자동차의 사이렌 소리는 작아지는 현상을 말한다.
허블 망원경으로 확인한 결과 우리에게서 먼 곳에 있는 은하는 적색 파장이 길게 나타나는 것을 발견했는데, 그런 현상은 더 멀리 있는 은하일수록 더 길게 나타났다. 다시 말해서 더 멀리 있는 은하가 더 빨리 멀어진다는 것이다. 그로써 우주는 팽창하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인데, 그런 팽창의 최초의 원인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엄청난 힘으로 거의 한 점에 뭉쳐 있었던 물질이 뻥 터졌다는 말이 빅뱅이다.
대폭발!
과학자들은 은하들과 은하단이 멀어지는 것을 역추적한 결과 우주의 나이를 측정해 냈다.
138억 년.
지금까지 우리가 아는 바로는, 우주에서 빛보다 빠른 것은 없다. 빛은 초속 30만 킬로미터로 달린다. 참고로 말하자면, 최근에는 초고속 카메라로 빛의 움직임을 찍는 데까지 과학기술이 발전했다. 단거리 운동선수가 뛰어가는 것이나 총알이 날아가는 것을 카메라로 찍는 것과 같은 기술이다. 초속 프레임 숫자를 증가시키는 기술만 있으면 된다. 현대의 최첨단 고속 카메라는 초속 프레임을 극적으로 늘려서 빛의 움직임을 잡아냈다는 것이다.
하여간 그렇게 우주가 팽창하는 것을 빛의 속도와 함께 감안하면 우주의 크기도 측정된다. 불변하는 빛의 속도, 초속 30만 킬로미터에 기초하여 계산한 우주의 크기는 950억 광년 정도 거리라고 한다. 물론 이것은 불확실한 추정치다. 우주는 빛의 속도보다 더욱 빨리 팽창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우주 외곽에 있는 은하는 빛보다 훨씬 빠르게 바깥으로 탈출하고 있다. (나는 이렇게 읽고 이렇게 적지만,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우주에서 가장 빠른 것은 빛이라 하고, 다시 은하가 빛보다 더 빠르게 멀어지고 있다고? 내가 뭔가 잘못 이해한 건가?)
그런 팽창이 발생하려면 미는 힘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은하를 밀어내는 힘이 은하를 구성하는 물질의 중력에 비해 커야 한다. 그렇게 밀어내는 힘의 최초의 동력이 빅뱅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릴 때부터 이 이론에 관해 여러 의문을 가졌었다.
왜 빅뱅인가.
우주는 언제까지 팽창하는가.
팽창하는 힘이 다하면 중력으로 인해 우주는 다시 한 점으로 모이는가, 아니면 영원히 팽창해서 모두 흩어지고 무로 변해가는가.
만약 중력으로 다시 한 점으로 모여든다면 다시 과도한 밀도로 인해 빅뱅이 재차 발생하는가. (그런 경우라면 우주는 그렇게 무한히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는가.)
그나저나 우주 바깥에는 무엇이 있는가 또는 없는가.
그 경계선이라는 게 있는가 없는가.
신이 있다면, 거기서 신의 역할은 무엇인가. 등등.
그런데 책의 저자는 단순하게 발상을 바꾸었다.
뉴턴 물리학에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로 우주물리학이 발전한 것처럼, 또 아인슈타인이 무시했던 양자역학으로 물리학이 확대된 것처럼 현대 물리학이 스스로 갇힌 굴레에서 벗어나는 역발상을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 우주가 아주 거대한 블랙홀 속에 있으면 지금까지 이해되지 않는 것들을 이해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빛과 중력의 관계이다. 저자는 빛의 속도가 불변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블랙홀에서 빛은 강력한 중력에 의해 탈출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중력에서 멀어지면 빛은 더욱 빨라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빛의 속도가 불변이라고 믿는 것은 우리가 은하수 안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중력장 안에서 시공은 모두 상대적이다.
알다시피 강력한 중력 속에 있으면 시간도 느리게 간다. 영화 '인터스텔라'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오는데 강력한 중력이 작용하는 행성으로 우주비행사가 다녀오는 동안 우주선 내에 있는 동료들의 시간은 훨씬 빠르게 흘렀다. 그런 현상은 인공위성에서도 확인된다. 작은 차이지만 중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곳에 있는 인공위성의 시간은 지상에 있는 우리의 시간보다 느리게 간다. 그래서 시간 보정이 필요하다. 그런 보정작업이 없으면 우리의 내비게이션 시스템은 엉망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는 빛의 속도는 우주가 지닌 중력에서 멀어질수록 빨라질 수 있다. 바로 그런 이유로 우리로부터 먼 곳에 있는 은하가 빛보다 더 빨리 멀어진다는 주장은 수정되어야 한다. 거기서는 중력에서 탈출한 빛이 더 빨리 갈 수 있다. 만약 빛이 더 느리다면 우주 바깥에 있는 관측자는 결코 우주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우주로부터 빛이 나오지 않으니까 말이다. 결국 만약 우주 바깥에 있는 관측자가 우주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빛의 속도가 가령 무한대로 빨라질 수 있다. 중력만 없다면. 우리가 측정하는 빛의 속도는 우리를 가둬둔 중력에 의해 왜곡된다는 것이다.
책의 내용은 물론 이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양하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이 책의 주장이 맞느냐 틀리느냐가 아니라, 우리 우주가 아주 거대한 블랙홀 속에 들어가 있다는 발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저자에 의하면 그렇게 믿고 보면 현대 우주물리학이 해결하지 못하는 많은 의문들이 풀린다고 한다.
물론 나는 이 남다르게 탁월한 상상력을 가진 저자의 말을 다 믿지 않는다. 우주 내의 물질들 상호 간의 역학관계를 저자가 적절하게 설명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책의 내용 가운데 암흑물질에 관한 저자의 주장은 틀렸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을 설명하려면 너무 길어져서 생략한다.)
그러나 저자의 성실하고 정렬적인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아마추어 연구자로서 이처럼 깊이 있고 세심한 연구를 거듭하고, 기존 우주과학자들이 떠올리지 못한, 또는 떠올리기 어려운 상상력을 발휘한 것까지도. 나아가, 그것을 공부와 연구에서 끝내지 않고 이렇게 책으로 발행한 것도.
우주에 관해서는 언제나 관심이 간다.
그것이 우리가 속한 가장 거대한 범주이기 때문이다.
4. 다시 문고판 서적 출판을 바라며
이 책을 대충 읽고 나니 한 시간 넘는 시간이 흘렀다. 나는 몇 개의 에세이와 소설도 훑어보았다. 그러나 정작 내가 찾기 원했던 ‘문고판’ 책을 찾지는 못했다.
의문이 든다. 왜 문고판 책을 출판하지 않을까.
그 책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손바닥에 쏙 들어가고 매우 가볍고 가격도 착한 책 말이다.
그렇게 작은 책은 주머니에 넣고 다니기도 좋고 가격도 싸고 무엇보다 작고 가벼워서 좋다. 언제나 어디서나 종이로 된 책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너나 할 것 없이 어디에서건 틈만 나면 스마트폰을 꺼내서 들여다보는 것보다 작은 책을 보는 풍경이 훨씬 좋을 것 같다는 내 생각이 고루한 것일까.
편리 문제를 떠나서 건강을 생각할 때 스마트폰을 보는 것은 문제가 많다.
무거운 기기를 들고 있는 것은 팔이 아픈 일이고, 고개를 숙이고 눈을 모아서 작은 글씨를 보는 것도 목과 눈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주는 것이다. 지하철에서 사람들이 핸드폰을 보는 모습을 보면 불쌍함과 삭막함을 느낄 때가 많다. 옆 사람이 보는 스마트폰 내용을 보면 답답할 때가 많다. 대부분이 게임을 하거나 스크린쇼핑을 하거나 웹툰이나 드라마를 본다.
좀 구식 같지만, 나는 아직도 책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대학 졸업까지 16년이나 학교를 다녀도 문해력이 떨어지고 말하는 것도 엉망인 사람이 많다. 특히 글쓰기는 더욱 그렇다. 철자법과 문법을 틀리는 것은 애교에 불과하다. 얼마 전 EBS 다큐에서는 고등학생들이 단어를 몰라서 한국사 책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내용을 보았다. 많은 경우 한자를 공부하지 않아서 역사 교과서에 나오는 단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교과서를 읽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고등학생들이라니! 분명히 과거보다 공부를 많이 하고 아는 것도 많은 것 같은데 교과서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역설!
말하고 듣기와 읽고 쓰기는 모두 책을 읽고 공부하는 데서 심화된다. 우리의 구어로만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디지털 서적과 문고판 서적 출판을 장려하고 독서 인구가 더 늘어난다고 해서 이런 문제가 잘 해결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아무튼 나는 아직도 문고판 책이 다시 나오기를 기대한다.
이렇게 말해도 이것이 나의 헛된 바람에 불과하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래서 그렇게 이루지 못하는 바람으로 인해 오늘 밤도 마음이 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