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구간이 끝나고 동생말에 이르렀을 때 그곳 지리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그곳이 어디인지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나는 그곳이 단지 광안리해수욕장으로 가기 전에 있는 어느 곳으로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아침에 오륙도 스카이워크에 가서 갈맷길을 걷는다는 것까지만 계획했지, 그 이상은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름다운 해안길이 끝났을 때 갑자기 나타난 동생말 이후 동네는 번화한 곳도 아니었다. 지하철도 버스역도 보이지 않는 곳이라 나는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해변 길을 따라가면 필시 광안리해수욕장에 이를 것으로 짐작했다. 이미 5킬로미터를 걸었어도 해안 풍광이 아름다워서 그랬는지 별로 피곤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원래 계획했던 것은 아니지만, 나는 광안리까지 계속 걷기로 했다. 길을 걷자니, 해파랑길을 안내하는 깃발과 표식을 보고 찾아가는 것도 은근히 재미있었다.
오륙도 스카이워크에서 한참 구경하고, 해파랑길을 걷기 시작한 시각은 1시 50분. 동생말에 이르렀을 때는 어느덧 이미 두 시간이나 지난 후였다. 나는 멀리 광안리 해변을 바라보고 자주 사진도 찍으면서 계속 걸었다. 그 중간에도 길이 예쁜 곳이 많았지만 찻길 옆 인도로 걸을 때가 많아서 처음 느꼈던 아름다움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바닷길을 따라 걷다가 수영구에 들어섰을 때 한 아파트 단지 (나중에 알고 보니, 남천동에 있는 삼익비치아파트) 아래쪽으로 걷기에 너무 좋은 도로가 있었다. 바다 바로 옆에 만들어진 넓은 도로가 오직 걷는 사람들과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을 위한 것(나중에 알고 보니, 광안해변로 자전거길)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거기서 걷거나 뛰거나 자전거를 탔다. 바닥에는 발이 피곤하지 않도록 푹신한 재료(아마 우레탄)를 깔아놓은 듯했다.
수킬로미터에 이르는 그 길이 거의 끝날 무렵 나는 우연히 자전거 무료 대여소를 발견했다. 간판에는 정말로 자전거를 두 시간까지 무료로 대여한다고 적혀 있었고, 사무실 옆에는 크기가 다른 여러 대의 자전거들이 서 있었다. 나는 이게 웬 떡이냐?라고 생각하고 사무실로 갔다. 돌연히 자전거를 타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무실에서 일하는 직원은 정말로 아무나 무료로 자전거를 탈 수 있다고 말했다. 사무실에 신분증을 맡기고 대여 신청서에다 이름과 주소와 전화번호 등을 적어 주면 자전거뿐 아니라 헬멧까지 주었다. 나는 어색하게 그 헬멧을 쓰고 자전거를 탔다. 방금 걸어왔던 푹신한 바닥의 좋은 도로를 다시 돌아보고 싶었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니 걷는 것보다 몇 배나 빨리 달릴 수 있었다. 바닥이 너무 좋아서 자전거를 모는 데 전혀 힘이 들지 않았다. 이미 5시가 되었으므로 나는 자전거를 겨우 20분만 타고 돌려주었다.
누구나 이렇게 좋은 도로에서 자전거를 무료로 탈 수 있다.
다시 광안리로 가는 길에서 나는 곧잘 해파랑길 표식을 잃고 다른 길을 걷기도 했다. 그러나 날은 여전히 밝았으므로 나는 그냥 바닷가 옆길만 따라갔다. 그러자 드디어 광안리 해변에 도달했다. 난생처음으로 말로만 들었던 광안리 해변을 직접 보게 된 것이다.
과거에 부산을 올 때마다 해운대를 방문했었다. 그만큼 해운대가 유명하기 때문이다. 부산이라고 하면 누구나 자갈치시장과 해운대해수욕장을 떠올리곤 했었다. 그러나 요즘은 광안리가 더 핫한 장소라고 한다. 드론 라이트쇼와 불꽃 축제를 비롯한 다양한 볼거리 행사는 요즘 광안리에서 벌어진다. 오는 11월 4일인가에 벌어질 불꽃페스티벌도 역시 광안리 해변에서 벌어진다. 그 축제를 보기 위한 주요 장소 예약비는 너무나 비싸다고 뉴스에서 여러 차례 보도된 바 있다. 해변과 광안대교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카페의 창가 자리는 수십만 원에 이른다는 말도 들었다.
광안리 해변 옆 인도는 무척 예쁘게 잘 꾸며져 있다. 인도 바로 옆에는 찻길이 있었고, 다시 그 옆에는 상점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다. 그것은 해운대와 다른 점이다. 해운대에는 상점건물들이 바닷가에 바로 붙어 있지 않다. 해운대 해변 옆에 나무들이 있고 그 옆에 차도가 있고 상점들은 더 떨어져 있다. 오로지 해운대역에서 해변으로 들어가는 곳에 있는 도로만 대단히 넓고 잘 꾸며져 있으며 가게가 밀집되어 있다. 아마도 500미터 정도 되는 이 도로의 가운데는 무척 넓은 인도가 있고 그 양옆에 겨우 차 한 대만 다닐 수 있는 차도가 있으며 그 옆에 다시 인도가 있다.
벅찬 마음으로 광안리 해변에 도착한 나는 손으로 바닷물을 만져볼까 생각했다가 포기했다. 바닷물에 손이나 발을 담그려면 모래사장을 한참 걸어 들어가야 하는데 이미 한참 걸어서 다리도 허리도 아팠기 때문이다. 광안대교와 모래사장을 바라보면서 나는 약간 고민했다. 여기서 걷기를 중단할 것인가. 아니면 해운대까지 계속 걸을 것인가. 이미 6시가 가까웠고 곧 어두워지기 시작할 시간이었다.
나는 그냥 걷기로 했다. 해운대까지.
거기까지 가면 나는 해파랑길 1코스를 완주하는 것이다. 그 욕심으로 인해 무리하고 있다는 생각이 없지 않았지만 나는 그냥 걸었다.
광안리 해변 끝자락에 이르자 ‘국화꽃 축제’가 벌어지는 장소가 나왔다. 그 안에 각종 국화꽃이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사진을 찍었다. 나는 꽃을 보고 별로 감탄하는 사람이 아니지만, 그곳의 꽃들은 무척 아름다웠으므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양한 색깔의 꽃들이 탐스럽게 무더기로 피어 있었다. 국화꽃이 이렇게 다양한가? 나는 새삼 국화의 아름다움과 다양성에 감탄하고 말았으며, 기회가 되면 다시 광안리를 방문하기로 작정하면서 길을 나섰다.
광안리 해수욕장 전경과 국화 축제
광안리에서 해운대로 가기 시작했을 때 날은 이미 어둑해지기 시작했다. 오늘 걸었던 구간 중 가장 힘들고 재미없는 곳이 광안리에서 해운대에 이르는 길이다. 도로가 복잡해지면서 중간에 해파랑 표식을 놓칠 때가 많았다. 아니, 어두워서 보이지도 않을 때가 많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자주 길을 헤매면서 사람들에게 물어서 길을 찾아가야 했다. 카카오맵을 보고 가지만, 지쳐서 그런지 곧잘 엉뚱한 곳을 걸어서 한참 돌기도 했다. 날이 어두워서 보이는 것도 많지 않아서 재미없었고 인도에 걷는 사람도 거의 없었으며 거리는 쓸쓸하기만 했다.
어느 아파트 단지 앞에 이르렀을 때 잉어빵을 구워 파는 트럭이 보였다. 나는 배가 고프고 지친 나머지, 잉어빵을 사 먹으면서 빵을 굽는 사장 부부에게 목적지인 해운대해수욕장을 물어보려다가 밤에 해수욕장을 묻는 게 이상할지 모른다 싶어서 해운대역까지 가는 길을 물었다. 아파트 단지를 돌아서 가는 길이 있는지 아니면 단지 안을 통과해서 가는 것이 좋은지 짐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잉어빵을 굽는 사장님은 해운대역보다 동백역이 훨씬 가깝다고 나에게 대답했다. 나는 다시 해운대역으로 가는 길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잉어빵을 봉지에 담아주는 사장 부인이 남편에게 핀잔을 주면서 말했다.
“아, 동백역이 아니라 해운대역으로 간다잖아요. 저쪽으로 가면 돼요.”
사장 남자는 내가 가까운 전철역을 찾아가기 위해서 묻는 것이라고 짐작해서 매우 논리적으로 말했을 것이다. 영리한 선견지명을 가진 대답이었다. 그러나 나의 물음을 곧이곧대로 이해한 여사장의 대답을 생각할 때, 나이가 들면 남자보다 여자가 말귀를 더 잘 알아듣는 것인지 나는 잉어빵을 먹으면서 생각했지만 그 진실은 알 수 없었다.
여사장이 가리킨 대로 나는 단지 안으로 들어섰으며 아파트 건물 사잇길을 통과해 나갔다.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서 그런지 아파트마다 불이 켜져서 분주한 느낌이 들었고, 이미 저녁을 먹은 아이들이 밖으로 나와서 내 옆으로 뛰어다녔다. 아직도 갈 길이 먼 나는 지친 마음과 몸으로 괜스레 서글픈 마음이 되어서 걸음을 재촉했고, 다시 한참 걸어서 겨우겨우 해운대 해변 옆에 도착했다.
카카오맵에서는 내가 이미 해운대에 온 것으로 보이지만, 바다가 캄캄해서 그런지 거리도 어두웠고 나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 잘 알지 못했다. 매우 어둡고 거리에 사람들도 거의 없었으므로 나는 처음에는 내가 해운대 해수욕장에 도착했는지 알지도 못했다. 그렇게 걷다가 갑자기 HAEUNDAE BEACH라고 적힌 안내판을 보고서야 나는 비로소 탄식했다.
아, 드디어 도착했다.
해파랑길 1코스를 완주했어.
해운대 해변 입구에 도착해서 차도를 건너려고 서 있을 때 수많은 여고생들이 몰려들었다. 물어보니 그들도 수학여행으로 부산에 왔다고 한다. 강릉여고 2학년 학생들. 3박 4일 일정으로 경주를 거쳐 부산으로 왔다는 것이다. 참으로 좋을 때고 재미있을 때다. 나는 중고등학생 때 그런 수학여행을 해본 적이 없는데.
광안리해변에 비해 어둡고 쓸쓸하기까지 한 해운대 해변에 서서 잠시 캄캄한 바다를 보고 있자니 시간은 이미 8시가 되었다. 오륙도 스카이워크에 도착했을 때가 1시 정도였으니까, 그때부터 지금까지 자주 앉아서 바다를 보면서 쉬고 20분 정도는 자전거를 타기는 했지만, 그밖에는 거의 계속 걸었던 셈이다. 나중에 숙소에서 핸드폰을 보니 페도미터 앱에서 3만보를 달성했다는 폭죽이 터지고 있었다.
해운대역 앞 번화한 도로에서 저녁으로 뭘 먹을까 생각하면서 걷다 보니 어느새 전철역에 도달했으므로 그냥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식당을 찾을 힘도 없었다. 정말 피곤했는지, 숙소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나는 약간 졸기까지 했다. 참으로 긴, 그러나 보람찬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