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한 달 살기 10월 22일 일 흐림
흐린 날이다.
오랜만에.
그 핑계로 오전 내내 침대에서 뒹굴거리다가 오늘은 푹 쉬기로 했다.
내일 아침에는 서울에서 친구 Y가 부산으로 올 예정이다. 나는 그가 부산으로 와서 가능하면 오래 머물기를 바랐지만, 그는 2박 3일 여정으로 오겠다고 대답했다. 그 기간 동안 나는 그와 함께 여행하기로 했다. 그는 이미 부산을 수차례 방문했었다. 그는 걷기를 좋아해서 한국의 둘레길을 도는 데 관심이 많고 매우 실천적이다. 그는 남파랑길도 이미 절반 정도 달성했다고 한다.
오후 2시가 되었어도 하늘은 맑지 않고 약간 쌀쌀한 날씨였다. 나는 오늘은 멀리 나가지 않고 숙소 건너편에 있는 부전시장을 조금 더 자세히 구경하고 따뜻한 음식을 먹기로 했다. 일단 값싸고 맛도 좋은 영자면옥 본점으로 다시 들어갔다. 이 식당은 부전시장 골목 입구에서 매우 가까우며 칼국수로 유명한 맛집이다. 그 식당 벽에 붙어 있는 안내문에 따르면, 방부제가 들어가지 않은 멸치 육수를 사용하고 투박한 칼국수를 사용한다고 하는데 어쨌든 맛이 좋다.
손님 숫자를 어떻게 집계했는지 모르지만, 식당 벽에는 부산에서 칼국수를 가장 많이 파는 곳으로 적혀 있다. 내가 보기에도 이 식당이 칼국수를 가장 많이 파는 곳일 듯하다. 아마 지나치게 저렴한 가격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 집처럼 손님이 많은 식당을 본 적이 없다. 나는 이미 서너 번 들렀는데 가게가 온종일 비어 있을 때가 없다. 특히 주중 낮 12시에는 입구에 수십 명이 줄을 선다. 주요 음식이 칼국수라서 회전율 또한 매우 빠르다.
식당은 매우 넓은 편이지만 워낙에 손님이 많이 오기 때문에 혼자 온 사람은 낯선 사람과 마주 앉아서 식사할 때가 많다. 손님이 가게에 들어서는 순간, 식당 종원원 중 누군가는 인사를 하고, 곧바로 자리에 앉도록 유도한다. 또한, 손님이 자리에 앉으면 곧바로 김치를 갖다 주면서 음식 주문을 받는다.
식당 직원들은 용의주도하게 혼자 온 손님들이 가능한 한 마주 앉지 않고 엇갈려 앉아서 먹도록 자리를 배치한다. 사실 음식을 먹을 때 낯선 사람과 바로 마주 보면 매우 불편하다. 식당 측은 또한 남성이 앉아 있는 식탁에는 남성이, 여성이 앉아 있는 식탁에는 여성이 마주 앉도록 배려(?) 해 준다. 그것은 손님들을 위한 세심한 배려이지만, 어찌 보면, 마치 식사하는 곳에서 남녀칠세부동석을 지키는 것과 같아서 약간 우습기도 하다.
이 집의 시그니처 음식인 칼국수는 겨우 3천 원이다. 그런데 국물이 있어서 그런지 양이 작은 것도 아니다. 짜장면도 3천 원. 세트 메뉴로 칼국수에 김밥이나 만두나 비빔밥 등을 함께 먹으면 6천 원이다. 그럴 때는 칼국수도 다른 음식도 양이 많지는 않다. 그래도 한 끼 식사로는 충분하다. 주머니가 얇은 사람들에게 착한 가격이다.
이 가게와 더불어 이전에 소개했던 화전국수도 괜찮다. 화전국수는 서면 식당가에 있다. 그 식당은 영자면옥만큼 손님이 많지는 않지만 역시 싼 가격으로 유명하다. 온국수 가격은 4500원. 수년 전에 3천 원이었지만 오른 가격이 그렇다. 비빔국수는 5500원. 맛도 좋고 양도 많은 편이다.
식사 후에 소화도 시킬 겸 나는 부전시장을 천천히 거닐기로 했다.
부전시장은 원래 한국전쟁 중 피난 온 사람들이 모여서 발전하기 시작한 시장이다. 1970년에 부전역상가아파트라는 법인체가 설립되었고, 1973년에 상가건물을 착공하여 1975년에 개장했다. 2006년 12월부터 이 시장은 부전마켓타운으로 불리기도 한다.
시장 안에는 제대로 꾸민 정식 점포 외에도 약간의 물품만으로 노점상을 하는 사람들이 무척 많다. 조그만 수레에 상품을 담고 끌고 다니면서 장사하는 상인도 있다. 바구니 몇 개에 과일과 채소 등을 놓고 바닥에 앉아서 영업하는 상인들도 있다.
이 시장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거의 모든 식품 재료부터 완성된 음식까지 있다. 부산이라서 그런지 싱싱한 해산물도 풍부하다. 수많은 완성품 반찬들도 많고, 원재료가 되는 배추, 무, 양파, 대파, 부추, 젓갈류, 멸치, 생선 등 없는 게 없다. 식품 외에도 가정에 필요한 각종 잡용품들을 잔뜩 쌓아놓고 파는 상점들도 있다.
부전시장은 내가 본 전통시장 가운데 가장 크다. 처음 온 사람은 미로처럼 얽힌 골목들에서 길을 잃기 십상이다. 내가 돌아본 결과 이 시장의 전모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매일 두세 시간 정도 돌아다니면서 일주일 정도 지나야 할 듯하다. 이미 그저께 부산시민공원으로 가면서 시장을 통과하고, 오늘 또 이 시장 안에서 두 시간 정도 돌아다닌 후 하는 말이다.
전통시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거의 다 노인들이다. 이따금 식품을 판매하는 젊은 아낙네 같은 사람도 있고, 활발하게 상품을 파는 젊은 남성들도 있기는 하다. 또한 중국에서 온 동포들도 많다. 이유는 모르지만 다리를 휘청거리면서 걷는 노인들도 무척 많고, 굽은 허리를 펴지 못하고 지팡이나 작은 수레 같은 것에 의지해서 겨우 전진하는 노인들도 있다. 서울의 전통시장과는 매우 다른 모습이다. 그만큼 서울에 비해 부산에 노인들이 상대적으로 많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부전시장과 가까운 서면시장에는 상대적으로 젊은이들이 모여든다. 서면역을 중심으로 부전시장은 북쪽에 서면시장은 남쪽에 위치한다. 서면시장은 롯데백화점 바로 아래쪽에 있다. 서면시장에서 부전시장까지 중앙대로 지하에는 지하상가(서면몰과 부전몰 등)가 길게 이어져 있어서 사통팔달이다. 그 지하에서는 어디로든 통할 수 있다. 이것은 말하자면 젊은이들이 모여드는 서울의 강남역 부근과 남대문시장이나 광장시장이 함께 있고, 그 지하에는 강남역 지하상가와 잠실 지하상가가 있는 것과도 같다.
그러나 서울에 비해 부산의 낙후된 모습은 확연히 드러난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저절로 그런 느낌이 든다. 강남이나 잠실에서 느끼는 세련됨과 화려함과 부티가 부산의 서면에는 매우 모자라다. 강남에 비해 서면의 상점 영업이 활발하지도 않고, 서면의 유동인구 숫자가 훨씬 적은 것도 확실하다. 부전몰 지하상가는 행인이 드물어서 매우 썰렁하다고 말할 정도다. (그것은 남포동에 있는 지하상가도 그렇다. 행인도 없고 손님도 없으므로, 내 눈에는 지하상가 상점들이 영업을 지탱하기가 어려워 보였다.)
아무래도 서울에 비해 규모가 작으므로, 부산 도심의 교통 체증은 서울 강남 일대에 비해서 훨씬 덜하다. 강남처럼 낮이나 저녁이나 자동차가 막히는 곳이 아니다. 그러나 버스를 타고 다니다 보면 부산의 도로가 매우 꼬불꼬불하게 이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일자로 길게 뻗은 도로가 거의 없다. 부산은 오랜 기간 동안 산과 해안 사이 지역에서 발전한 도시이고, 워낙에 산이 많아서 도로는 꼬불꼬불하고 오르락내리락거린다.
부산은 한국에서 제2의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괴물 같은 서울에 비해 훨씬 작다고 할 수 있다. 젊은이들이 대학만 졸업하면 수도권으로 몰리는 대한민국! 블랙홀 같은 서울의 몸집 불리기는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지방이 소멸되고 있고, 노인들만 남는다는 경고가 수십 년째 이어지지만 상황은 계속 악화하고 있다.
과연 서울이라도 계속 잘 발전할 수 있을까. 현재는 서울이 첨단 도시로 보이지만 미래, 가령 50년 후에는 어떻게 변할까. 한국에 관한 이해가 조금씩 깊어질수록, 미래에 대한 낙관적 전망은 뚜렷하지 않고 마치 안개가 끼어 시야를 가리는 것처럼 조금씩 흐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