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한 달 살기 11월 2일 목 맑음
이런 날은 조금 난감하다.
하루 사이에 너무 많은 것을 한꺼번에 봐서 그 모든 경험과 느낌이 약간 뒤섞인 것 같은 날 말이다.
오늘 하루에 대구를 방문하고 와서 그렇다.
울산에서는 두 곳에 집중했던 것에 비해 대구에서는 여러 곳을 들렀고 많은 것을 보았다. 대구의 특성상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걸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또 과연 차분하게 내가 보고 느낀 것을 잘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루 여행이지만 내용이 길어서 여러 번으로 나눠서 적어야 할 듯하다.
대구는 나에겐 처음이다. 직접 가서 본 게.
대학에 들어오기 바로 전에 아주 잠시 기차를 갈아타기 위해서 대구역 앞에 내렸었나...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때 내려서 국밥 먹었던 곳이 어디였던가. 혹시 대전이었나.
“어따 대구 대구 대구 하는 거야?”
대구를 빗대어 어릴 때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철없는 농담을 하기도 했었다.
대구 그러면, 한때는 정치적으로 매우 진보적이었지만 언젠가부터 한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곳이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그런 것은 일종의 고질적인 편견으로 남아서,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서 매우 불편할 수 있다. 광주 사람을 만나서 5.18을 먼저 떠올려서는 안 되는 것처럼 대구 사람을 만나서 가장 보수적인 사람처럼 먼저 추측할 일은 아니다. 보수적인 광주 사람도 있고, 진보적인 대구 사람도 있다. 정치적 편견으로 그들을 대하는 것은 그들 입장에서 매우 불편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나는 여행자로서, 정치적 편견과 편협증과 조급증을 버리고 가능한 한 대구를 객관적으로 보고 싶었다. 직접 그 속살을 보면서. 거기에도 나 같은 사람이 살고 있고, 누구나 겪는 삶의 고달픔과 사연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나의 관심은 도시의 역사와 환경과 거기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과 일상이므로.
1. 드디어 대구로 갔다.
아침에 KTX를 타고 대구로 갔다.
놀라지 마시라.
부산역에서 동대구역까지 겨우 45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서면역에서 다대포역까지 가는 시간보다 덜 걸린다.
강남역에서 광화문 앞까지 가는 시간보다 덜 걸린다.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제주공항에 도착하는 데 걸리는 시간보다 덜 걸린다.
너무 빠르지 않은가. 근처에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어디 가려고 해도 한 시간은 기본인데, 부산에서 대구까지 한 시간도 안 걸린다니! 이미 여러 번 말했지만 이럴 때마다 순간적으로 공간이동이 발생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나 나중에 다시 말하겠지만, 빨라서 좋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너무 빨라서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있다.
동대구역에서 내린 나는 역 앞에 있는 ‘Tourist Information’을 찾아갔다. (이 사무실에는 영어로만 이렇게 적혀 있어서 아쉽다! 한국말은 왜 쓰지 않을까.) 어젯밤에 나는 인터넷을 통해 대구에서 유명한 곳을 찾아보았지만, 대구의 지리를 몰라서 여행 동선을 짜기가 어려웠다. 다만 이런 곳을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1)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 2) 근대문화마을, 3) 서문시장, 4) 동화사, 5) 앞산 케이블카, 6) 수성못
물론 지금까지의 경험상 이 모든 것을 하루에 다 가볼 수는 없을 것이라고 짐작하면서.
동대구역의 ‘여행정보센터’에 들어갔을 때 그 짐작이 맞았다는 것을 즉시 깨달았다..
나의 계획은 엉망이었다. 전적으로 대구를 잘 몰랐기 때문이다. 대구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여행 계획이 수립됐다. 그런데 그렇게 짜인 것도 움직이다 보니 또 금세 달라졌다. 내가 좋다고 느끼는 것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걸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사실은 혼자서 여행하는 묘미다. 누군가와 같이 다닌다면, 오늘처럼 내 마음대로 가고 싶은 곳을 가고, 중간에 계획을 확 바꾸고,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천천히 걸어 다니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여행정보센터의 직원은 나에게 ‘시티투어’ 버스를 탈 것을 권했다. 대구를 하루에 돌아볼 수 있는 방법이라고 했다. 원래 티켓 가격은 1만 원이지만, KTX를 타고 왔으므로 8천 원만 내면 된다고 했다. 이 버스를 이용하면 정해진 곳에서 내렸다가 다시 탈 수 있다. 문제는 마지막 버스가 오후 5시 정도에 끝난다는 것. (부산으로 돌아가는 나의 기차 스케줄은 오후 8시14분이었다.)
지도를 놓고 상냥하게 여행 동선을 설명해 주는 직원과 협의한 결과 바뀐 여행 동선 계획은 이렇다.
1)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 2) 동성로, 3) 근대문화마을 (대구제일교회, 김원일의 마당 깊은 집, 계산성당), 4) 서문시장, 5) 앞산 케이블카 타기, 6) 수성못 야시장.
그런데 그 직원도 너무 과도하게 스케줄을 잡은 것으로 곧 판명됐다. 물론 그녀의 잘못이 아니다. 그녀는 아마 내가 ‘근대문화마을’에서 그렇게 시간을 지체할 줄 상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설명을 들을 때는 나도 알지 못했으니까.
빨간색 시티투어버스를 탔을 때 운전기사도 매우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내가 어디에서 내려서 무엇을 보고, 어디로 걸어 다니고, 언제 어디에서 다시 시티투어버스를 타야 하는지를. 그것은 내가 출발 시간보다 15분 정도 먼저 버스로 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출발할 때마저 버스 안에 관광객이라곤 나 외에 두 사람이 더 있었을 뿐이다.
김광석길에서 나를 내려주기 전에, 그는 섬유산업으로 발전한 대구 현대사와 이병철의 삼성상회 등을 기본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 주었다. 그는 특히 버스를 타고 가다가 삼성상회 건물 조형물과 이병철 조각이 있는 곳에 정차하더니, 사진이라도 찍으라고 권했다.
조선시대에 달구벌이었던 대구는 20세기 초에 경부선 열차가 다니기 시작하면서 급속히 발전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 시기에는 유엔군의 낙동강 방어작전이 성공함으로써 대구는 비교적 도시 파괴를 겪지 않았고 그로 인해 근대 역사 유적이 잘 보관된 편이다.
1960년대에는 한국이 경공업 발전에 치중했던 때였고, 그 핵심은 대구의 섬유산업에 있었다. 그러나 70년대 들어 박정희 정권의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이 본격화하면서 대구는 점차 상대적으로 낙후되기 시작한다. 하여간 이병철은 해방 전부터 삼성상회를 키워나가기 시작했고, 훗날 이 기업이 삼성물산의 전신이 된다. 그러므로 간단히 말해서, 대구 하면, 섬유산업과 이병철과 삼성을 빼놓을 수 없다.
2.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
이 글을 읽는 사람은 가수 김광석이 누구인지 모두 알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왜 대구에서,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이 만들어졌는지는 나처럼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예술문화적 이유에서 시작한 게 아니라 상업적 목적으로 시작됐다. 그런데 그게 상업적으로도 관광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성공하면서 대구도 김광석도 더욱 유명해졌다.
김광석 다시그리기길은 중구 대봉동에 있는 재래시장인 방천시장 활성화 프로젝트였다. 2010년 11월 시장 내 골목 90미터 구간에 김광석을 그리는 길을 조성했다. 그런데 이 길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현재는 350미터 구간으로 확장됐다. 방천시장은 대구의 신천과 국채보상로가 교차하는 수성교 옆에 있다. 신천제방을 따라 개설된 시장이라 하여 방천시장이 됐다.
방천시장은 해방 후 일본과 만주 등에서 온 이주민들이 몰려들어 형성되었고, 지속적으로 발전하면서 60년대에는 점포 수가 1천 개가 넘는 큰 시장이 되었다. 그러나 도시 공동화와 대형마트 개설 등으로 이 시장은 점차 쇠락의 길을 걷게 됐다. 그러자 시장 활성화를 위해 대구시에서 출생한 김광석을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방천시장은 김광석이 1993년과 1994년에 발표한 음반 ‘다시 부르기’에 착안했다. ‘다시 부르기’를 ‘다시 그리기’로 바꿔 이름 붙임으로써, ‘그리기’가 ‘그리워하다’와 ‘(그림을) 그리다’라는 중의적 의미를 갖도록 의도했다. 이 이름이 긍정적 효과를 주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일단 김광석을 끌어들임으로써 성공의 기본바탕이 깔렸다고 보는 게 맞을 듯하다. 아직도 그의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이 무척 많고, 그가 불현듯 세상을 떠난 것을 아쉬워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김광석은 1964년에 대구 대봉동에서 태어났지만 1968년에 서울 창신동으로 이주했다. 1984년에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집에 참여했고, 1988년에는 밴드 ‘동물원’의 멤버로서 활동했다. 이듬해에는 솔로로 데뷔했으며 1994년까지 정규 음반 4집까지 발표하면서 성공적인 유명 가수가 되었다. 그는 방송 출연보다는 관객과 직접 소통할 수 있는 소규모 콘서트를 좋아했다. 1995년 8월 그는 무려 콘서트 1천 회 공연을 기록했다.
1995년 11월 말이었다.
김광석이 뉴욕을 방문하여 맨해튼에 있는 머킨 콘서트홀에서 단독 콘서트를 한 것은.
그의 노래를 좋아하는 나도 그 자리에 참석했다. 2층 맨 앞자리에서 그의 공연을 직관했다. 그는 혼자 무대에 나와서 기타와 하모니카만 가지고 한 시간 반에 이르는 콘서트를 이끌었다. 약간 큰 무대라 썰렁하기도 했고, 다소 낯선 풍경이었다.
그로부터 40일이 조금 더 지났을까.
그의 돌연한 사망이 뉴스로 떴다.
충격적인 뉴스를 듣고 나서 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니, 뉴욕 공연에서도 그의 얼굴에 밝음보다는 어두움이 더 많았던 듯하다. 혹시 조금 더 조그만 무대였다면, 그래서 가수와 관객이 더욱 가깝게 눈을 맞출 수 있는 공간이었다면, 조금이라도 다른 무대가 되었을까. 그가 더욱 정답고 더욱 많이 웃을 수 있는 콘서트가 되었을까. 그랬다면 나도 그의 얼굴과 목소리를 더욱 밝고 생생하고 선명하게 그릴 수 있을까.
그래도 뉴욕에서 그의 콘서트에 참여한 기록이 어딘가.
아직도 그의 음악을 듣고 그를 사랑하고 그의 죽음을 아쉬워하는 사람이 여전히 많다.
근데 광석이는 왜 그렇게 일찍 죽었다니?
2000년 개봉한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배우 송강호가 했던 말이다. 김광석을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그런 의문이 가슴속에 깊이 남았었다. 송강호의 대사는 두고두고 가슴에 남았는데, 나는 그 대사를 그의 죽음이 꼭 의문스럽다,라기보다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남는다는 말로 이해한다.
아무튼 그 후로 수십 년이 흘렀는데도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은 여전히 많다. 그래서 굳이 대구로 와서, 일부러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 그 골목에 들어서니, 주로 중년 여성들이 많지만 젊은이들도 있었다. 골목 입구에는 기타를 들고 앉아서 노래하는 그의 동상이 있다. 긴 골목을 따라 천천히 걷다 보면 그의 행적을 기리는 여러 벽화가 끝없이 그려져 있다. 벽화 맞은편으로는 식당과 술집과 카페가 줄지어 있다. 그 골목에는 온종일 김광석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시장의 상업적 목적과 김광석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뒤섞여 있어서 기분이 썩 좋기만 하지는 않다. 그래도 쇠락하는 시장이 이렇게 해서 조금이라도 경제적으로 활성화된다면 그것도 무조건 안 좋게 볼 일은 아니다.
한국의 어느 골목에서 김광석을 이렇게 추모하고 그리워하면서, 또 그의 음악을 들으면서 걸을 수 있을까. 그 골목에는 아담하게 잘 만들어진 무대도 있다. 거기에서 정기적으로 ‘김광석 다시 부르기’ 공연이 있어서 유명하지 않은 많은 인디 가수들도 출연한다. 그것도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이렇게 말하다 보니, 자꾸 김광석 노래가 생각나고, 그가 또 그리워진다.
너무 빠르잖아. 겨우 서른한 살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