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한 달 살기 11월 2일
5. 근대문화마을과 대구제일교회
대구의 골목길 여행은 10코스나 있는데, 나는 주로 2코스를 다니기로 했다.
2코스의 동선은 동산선교사주택 -> 3.1만세운동길 -> 계산성당 -> 이상화고택 -> 서상돈고택 -> 염매시장으로 이어져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런 동선을 그대로 따라가지는 않았다.
내가 2코스에 관심을 가진 것은 거기에 ‘근대문화마을’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여행안내 지도에 나온 대로 천천히 그 골목길을 따라 걸었다. 길이는 짧지만, 대구제일교회부터는 선교사 순례길이기도 하다.
대구제일교회는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대단히 의미가 깊은 곳이다.
이 교회는 1893년 설립된, 대구 최초의 개신교 교회이다. 내가 가본 곳은 구본당인데, 1933년 개축된 곳이며 현재는 대구제일교회 100주년 기념관으로 사용되는 곳이다. 이 교회는 외부에서 볼 때부터 웅장하고 오래된 역사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교회 본당 내부는 역사적 전시물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이 교회가 위치한 곳은 행정적으로는 동성로에 속하지만, 약령시 약전골목 한복판에 있으며, 약령시 한방박물관, 대구교남YMCA회관, 대구 최초의 천주교 성당인 계산주교좌성당 등이 이어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대구제일교회 구본당 건물은 전형적인 고딕양식으로 지어졌으며 종탑 높이는 33미터에 이른다. 크지 않은 마당을 지나 기념관 내부로 들어서면 대구제일교회의 역사와 교회 초기에 사용됐던 기독교 자료들이 잔뜩 전시되어 있다. 마치 천년 고찰처럼 긴 역사는 아니라 해도, 이곳에서도 성스럽고 경건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100년 전에 사용된 때 묻은 성경 자료들과 교회 운영 자료들을 눈앞에서 보면 더욱 그런 느낌이 든다.
이 교회는 1893년에 설립되었다. 첫 한옥교회는 1896년에 매입되어 사용됐다. 그 한옥교회 마루에 앉아서 찍은 교인들의 사진을 보면 마음이 애틋하다. 서양 선교사를 중심으로 하얀 한복을 입은 조선인들이 한옥 마루에 앉아서 찍은 사진이다. 그 사진이 어떻게 찍혔고 남았는지는 적혀 있지 않다. 이 지역에서 기독교를 전파하고 처음으로 교회를 설립했던 인물들은 미국의 북장로교 선교사들이었다.
1906년에는 함석지붕을 덮었지만 종탑까지 세운 교회가 건설되었다. 이 교회는 조선인들에게 신기한 건물로 구경거리가 되었지만, 1931년에 철거되었다. 그 건물은 건축사적으로 큰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교회의 정면을 찍은 흑백 사진 한 장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이후 새로 지은 거대한 교회 건물이 현재 우리가 보는 기념관 건물이다. 구제일교회는 이 기념관 건물을 계속 예배당으로 사용하다가 1996년에 청라언덕에 새 건물을 짓고 이전했다.
‘미션’ 같은 영화를 보면서도 느낄 수 있겠지만, 기독교 선교사들이 자신의 종교를 전파하기 위해 낯선 이국 땅으로 가는 일은 보통 사람들로서는 이해하기 힘들다. 선교사들은 선교지 주민들이 이생에서 갖는 삶의 고달픔과 시련을 함께 나누면서, 그들에게 현세구복의 희망을 갖도록 하는 동시에 내세의 영원한 지복을 찾는 방법을 전파한다. 선교사들이 뛰어드는 그러한 전도 행위는,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에게는 놀랍고도 엄청난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라 신앙적 의미가 아니라면 쉽게 이해할 수 없다.
물론 사기꾼 같은 선교사들도 있다. 그들에 의해 더욱 망가지고 타락하는 현지 주민들도 있다. 헛된 믿음으로 지나치게 현세구복을 추구하는 추태를 보이는 것도 안타깝고, 내세지복을 향해 간다면서 고난의 현세를 평화롭고 정의롭게 살리기 위한 노력을 잊거나 포기하게 하는 것도 종교의 함정이기는 하다.
선진국으로부터 낯선 종교가 전파되면서 그들의 선진 문물로 인해 피선교지의 전통적이고 토착적인 문화가 무시되고 파괴되고 버림받는 현상은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것을 어떻게 슬기롭게 풀어낼까 하는 고민은 기독교나 불교 등 거대 종교가 전도에서 부딪히는 숙제이기도 하다. 자신의 종교의 우월성과 진실성만 내세우려는 오만하고 탐욕적이고 공격적이고 천박한 사람들과 그들의 잔인하고 파괴적인 폐해를 너무 오랫동안 경험했으니 하는 말이다.
6. 대구교남YMCA와 신간회
대구제일교회 맞은편에는 대구교남YMCA회관이 있다.
처음에 나는 이 건물이 별로 크지 않아서 미처 알아보지 못한 채 카페 건물 정도로 여기고 지나쳤다. (그 거리에는 다행히 높은 건물은 없었다.) 그런데 붉은 벽돌 색깔에 잘 어울리는 짙은 갈색 정문 입구 양옆에, 한쪽에는 교남YMCA라는 현판이, 다른 한쪽에는 경북서원이라고 한자로 적힌 현판이 세로로 걸려 있었다.
이 회관은 붉은 벽돌로 아담하고 예쁘게 지어진 2층 건물이다. 이곳이 유명해진 이유는 일제강점기에 이곳에서 여러 독립운동가들이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입구를 들어서면 작은 방들에 독립운동 전시물이 있고, 삐걱거리는 좁은 나무 계단을 올라 2층으로 올라가면 비교적 넓은 공간이 나온다. 그곳이 이 건물의 집회 장소인 듯했다. 그곳에도 물론 100년 전의 활동을 기록한 여러 사진들과 설명들이 보였다. 오래된 나무에서 풍겨 나오는, 결코 나쁘다고 할 수 없는 냄새가 코로 스며들어서 고풍의 정서를 더했다.
종합적으로 보면, 이 건물의 1층은 대구 3.1운동 기념관으로 조성되었고, 2층은 1914년 건축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복원하여 100년이 넘은 목재 건축 구조를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3.1운동 기념관은 대구 YMCA의 초대 회장이었던 이만집 목사와 김태련, 김영서 등 7명의 애국지사를 기념하는 곳이다. 이만집 목사는 대구에서 교남기독교청년회 발기인이자 3.1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인물이다. 여기에는 그들의 애국운동 참여 기록과 공판 기록 등이 전시되어 있다.
대구 YMCA지부는 1921년 12월 창립되었다. YMCA가 추진하거나 참여했던 물산장려운동, 기독교농촌운동, 이만집 목사의 3.8만세운동 등이 모두 이곳에서 논의되기도 했고, 신간회의 대구지부 활동공간으로서 역할을 하기도 했다.
미국에서 한국으로 전파된 많은 사회단체와 종교 조직들이 결국 사라졌어도, YMCA가 현재까지 살아남은 것은 어쩌면 일제강점기에 YMCA 선배들이 했던 이런 노력 때문이 아닐까.
7. 대구 약령시와 한의약박물관
대구의 약령시는 360년간 한약재를 국내외에 보급하는 한약재의 성지다.
약령이란, 의약품의 기준을 정하여 질병 예방과 치료의 효용성을 높이기 위해 의약품의 규격을 정한 법령이다. 약령시란, 그러한 의약품이 거래되는 시장을 말한다.
약령시가 개장된 것은 1658년 효종 9년 때다. 지난 2001년 한국기네스위원회는 이곳을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약령시로 인증했으며, 2004년에는 처음으로 한방특구로 인정했다. 그런 이유로 인해 약령시한의약재박물관이 여기에 지어졌다.
우리나라는 옛날에는 중국에서 약재, 즉 당(나라)약을 들여와서 사용했었다. 조선 초기에 약재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당약과 비교되는 조선 토종 약재를 채취하고 재배하는 일이 장려되었다. 그런데 중종 이후 임진왜란 때까지는 다시 당약이 늘어나서 조선의 약재 시장은 매우 위태로워졌다. 그러나 임진왜란 후에 청나라에서 약재 부족 현상이 발생하면서 조선에서는 다시 약재 채취와 재배가 장려되었고 약재 시장도 활성화되었다.
한편 약재를 중앙 관아로 공납하는 과정에서 사기와 착취가 만연했는데, 이를 바로잡기 위한 대동법이 제정되었다. 그 법령에 따라 약령시가 생긴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약령시가 삼백 년이 넘도록 존속한 것은 세계 약학 역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다. 그러한 약령시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대표적인 곳이 바로 대구약령시였다. 이 같은 배경에서 대구의 중구 남성로를 ‘약전골목’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여러 박물관에 들어가 보았지만 한의약재박물관은 처음이다. 이곳을 들어서면 서양의학에 친숙한 사람들은 아무래도 낯선 느낌을 받게 된다. 일단 박물관에 근접하면서 공기 냄새가 다르다. 한약재 냄새가 많이 배어 있다는 말이다. 약간 어색하기는 하지만 그 냄새를 맡으면서 나는 박물관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에는 과거에 약재를 만들고 거래하는 역사 유물들과 조각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의학에는 문외한인 나 같은 사람의 눈에는, 오늘날 한의학 또는 동양의학은 과학적으로 서양의학에 밀리는 것으로 인식된다. 대한민국에서는 특히 배타적 성격이 강한 의사 집단인 대한의사협회의 강력한 저항으로 한의학이 더욱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문제를 나 같은 사람이 제대로 이해하기는 힘들다. 다만, 한의학의 과학적 허실을 따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전통의학에 대한 국가의 과학적 재정적 지원이 없다면 한의학의 미래는 더욱 어두워지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