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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이야기 5
(대구문학관과 향촌문화관)

부산에서 한 달 살기 11월 2일

by memory 최호인


11. 대구문학관 겸 향촌문화관


그래서 가게 된 곳이 대구문학관 겸 향촌문화관이다.


이런 곳이 있는지도 모른 채 대구에 왔고, 이곳을 방문할 계획도 없었는데 순전히 대구근대역사관 직원의 말을 듣고 온 것이다. 그런데 미리 말하자면, 이 우연한 사건의 결과에 나는 만족한다.


대구문학관은 원래 입장권이 2천 원인가 했는데, 마침 퇴근 준비를 하는 듯한 직원이 문 닫을 시간이 30분밖에 안 남았다고 하면서, 나에게 그냥 들어가서 빨리 돌아보라고 말했다. (대구문학관의 마감 시간이 7시일 것이라고 말했던 근대역사관 직원의 말은 틀렸다.) 나에겐 단지 30분만 주어졌을 뿐이다. 괜히 마음이 바빠져서 빨리 걸었는데, 다행히 문학관이 크지 않아서 오래 걸리지 않았다.


미처 알지 못했는데, 대구에는 유명한 문인과 예술가들이 정말 많다.

이상화, 이장희, 현진건, 이육사, 박목월, 조지훈, 오일도, 백신애, 김동리, 유치환, 하근찬, 이오덕, 권정생 등이 일제강점기와 전후에 대구에서 태어나거나 대구에서 활동하였다. 한국 최초의 가곡인 ‘고향동무’를 작곡한 박태준도 대구 출신이고 나중에 친일파로 더욱 유명해진 현제명도 이곳에서 활동했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나는 흰 나리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 동무야.

내가 네게서 피어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어릴 때 학교에서 배웠던 동요 ‘동무생각’의 1절 가사다. 나는 이 노래를 좋아했고 꽤 자주 불렀다. 박태준의 추억담을 들은 시인 이은상은 그 곡에 이렇게 아름다운 노랫말을 붙여주었다. 가사에 나오는 청라언덕은 서양에서 온 선교사들의 사택들과 대구 제중원 등이 들어섰던 곳이다. 이 언덕은 박태준이 다녔던 계성학교 건너편 언덕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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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잡지 ‘개벽’에 이상화가 발표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대학 시절 우리에게 언제나 가슴을 뜨겁게 했던 시다. 당대에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학생들은 이 시로 지어진 노래를 목놓아 많이도 불렀다. 일제 식민지가 되어 좌절과 치욕으로 얼룩진 가슴에 눈물을 머금으면서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은 봄을 기다렸던 조선인의 피 끓는 절규였다


(나중에 부산에서 한 달 살기가 모두 끝난 후 서울에 올라갔을 때 대구에서 살았던 친구를 만나서 대화하다가 청라언덕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는 나의 부산 여행기를 모두 읽고 있었는데, 특히 대구 이야기가 나와서 매우 흥미롭게 보았다고 한다. 비록 어릴 때지만 수년간 대구에 살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도 청라언덕이 어떤 곳인지 미처 알지 못했다고 한다. 내 글을 읽으면서 어릴 적 추억을 되살릴 수 있어서 좋았다고 하니, 나도 고맙고 좋다.)


‘향촌’문화관이라는 이름을 두고 생각해 보았다.


알고 보니, 향촌동은 1970년대에 대구에서 가장 번화한 지역이었으며 한국의 문화예술이 깊이 자리 잡은 곳이었다. 한국전쟁과 함께 피난 왔던 문화예술인들이 대구 향촌동으로 몰리면서 주점과 다방 등이 생겨났다. 원래 대구문학관 겸 향촌문화관이 있던 자리는 선남상업은행이 있었던 곳인데, 2014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전체 4층 건물에서 향촌문화관이 1,2층을, 대구문학관이 3,4층을 차지하고 있다.


이 가운데 2층은 옛날 향촌동 거리를 축소 복원해 놓은 듯하여 특히 눈에 띄는 곳이다. 과거에 향촌동에 있었던 여관과 다방, 양복점과 금은방 등 다양한 상점들을 전시해 놓았다. 겨우 차 한 잔 탁자 위에 놓은 채 다방에서 출판 기념회를 열었던 문학인들과 그림을 그렸던 화가들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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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색 조명으로 빛나는 간판이 켜진 ‘카스바’가 눈에 들어온다. 주점 카스바에는 영화인들이 즐겨 찾았다. 신상옥과 최은희 등도 이곳을 자주 들렀다고 한다. 전쟁으로 배고픈 시기에도 영화인들은 영화를 만들었고, 시인은 시를 썼고, 화가는 그림을 그렸다.


옛 거리를 천천히 걸으면서 나는 그 궁핍한 시절에 배고팠던 시인과 소설가, 음악가와 화가와 영화인들이 모여 앉아서 문학과 예술을 논했던 풍경을 상상해 본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배가 고플 때 예술은 오히려 깊어지고 풍성해지는 것인지 모른다.


대구문학관에는 일제강점기에 태동한 조선 근대문학으로부터 전후 문학에 이르기까지 한국문학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는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1920년대부터 1940년대에 걸쳐 활약한 이상화, 현진건, 이육사 등과 청록파에 이르기까지 참여문학과 순수문학 작가들의 작품이 망라되어 있다. 특히 한국전쟁 시기 대구는 문학의 도시로서 자리 잡았다.


청라언덕에 있었던 대구제중원에 관해 조금 더 설명하고 싶다. 앞서 설명했던 대구제일교회를 설립한 사람은 미국 북장로회에서 파송된 선교사 윌리엄 베어드 목사였다. 그가 1893년에 남문안교회(현 대구제일교회)를 세웠을 때 즈음해서 대구로 온 최초의 의료 선교사는 우드리지 존슨이다. 1899년 그는 대구제일교회 내에 제중원이란 간판을 걸고 진료활동을 시작했다. 이 제중원이 계명대 동산의료원의 효시이다.


서울에 있었던 제중원은 1885년 고종이 조선 최초의 의료기관인 광혜원을 제중원으로 개명한 것이다. 서울 제중원은 연세대와 서울대 의대로, 대구제중원은 계명대로, 광주제중원은 광주기독병원으로 계승된다. 이를 두고 서울대 의대와 연세대 의대가 서로 자신이 제중원의 후계자라고 주장한다는 말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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