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한 달 살기 11월 2일
13. 서문시장과 경상감영
나는…
현재 나는 여행자이다. 오늘 처음으로 대구를 찾아와서 지금까지 일곱 시간이 넘도록 난생처음 보는 길과 건물들을 헤매며 걸어 다녔다. 아직 나에게는 아마도 청라언덕역에서 지하철을 타기 전까지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이 남았을 것이다. 그것을 깨닫고 나서 돌연히 서문시장을 떠올렸고 그곳으로 빠른 걸음으로 찾아갔다. 녹향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였다.
왜 자꾸 서면시장을 보고 싶어 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전통시장만 보면 괜히 한 번 들어가 보고 싶고, 그곳에서 어쩌면 평생을 보낸 늙은 상인의 얼굴을 보고 싶기도 하다. 세상은 그토록 빨리 변해왔지만 재래시장 상인들은 그 변화에 거의 무관한 듯 보인다. 시대의 추이를 따르지 못한 채 평생 “뻥튀기요”라고 외치거나 기름내로 찌든 전만 부치거나 국수를 말아서 파는 노인들이 있는 곳.
그래도 세상이 좋아져서 그런지, 그들은 당신의 아들 딸들이 어느 대학에 갔고 어디에서 취직하여 살고 있다고 말하곤 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 칙칙하고 음습한 시장에서 여전히 못 벗어나고 있다.
살던 대로 살아야지, 이제 와서 어디 가겠나.
그들이 말하지 않아도 시장에서 그들을 보면 내 귀에 그런 말이 들리는 듯하다. 나는 그렇게 살지 못했지만 그들의 손을 보는 것만으로도 때로는 고단한 삶의 느낌이 전해지곤 한다. 부추 한 단, 두부 한 모라도 팔아야 오늘 일당이라도 맞출 수 있을지 모르는 길가 좌판 할머니들의 얼굴을 보는 것은 괜히 송구스럽다.
서문시장이 나에게 그런 전통시장의 일반적 이미지에서 벗어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왠지 내로라하는 보수 정치인들이 툭하면 방문하는 서문시장을 나도 직접 가서 보고 싶었다. 혹시 그곳을 직접 가서 보면, 보수 정치인들의 정책과 전통시장의 이해관계가 화합될 수 있는 뭔가를 이해하거나 발견할 수 있을까.
그러나 너무 늦었다. 내가 도착했을 때 서문시장은 이미 파장한 분위기였다. 시장골목에 있는 가게들은 모두 문을 닫아서 골목 안은 어두워 보였고, 길거리 가까운 곳에 있는 조그만 떡볶이 가게와 순대 포장점들도 거의 모두 문을 닫는 중이었다. 나는 아쉬운 마음에 혹시 식사할 수 있는 곳이라도 찾을 수 있을까 하면서 시장 골목으로 둘러보았다. 마땅히 눈에 띄는 가게가 없었으므로, 시장 밖으로 나오다가 그나마 아직 영업 중인 천막가게로 들어섰다. 손님 세네 명이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냄비우동을 주문하고 기다리면서 물었다.
“시장이 꽤 일찍 파장하네요.”
“여섯 시에 모두 닫습니다.”
“부전시장은 일곱 시에 폐장하는데 서문시장은 왜 한 시간이나 일찍 문을 닫죠?”
서문시장의 상점들은 코로나19 사태 이후 모두 여섯 시에 문을 닫고 있다고 가게 주인은 대답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코로나19 위기가 지나간 지가 언젠데 아직까지도 여섯 시에 문을 닫다니! 일 끝나고 퇴근하는 사람들이 서문시장을 찾는 일이 없다는 말인지, 또는 그만큼 장사가 안 된다는 말인지 나는 의아했다. 아무튼 대도시에 있는 유명 전통시장 치고 서문시장은 너무 일찍 폐장하는 편이다. 모두 문을 닫아서 어둡고 쓸쓸홰 보이기만 하는 서문시장 골목을 보려니 뭔가 애처로운 마음이 들었다.
서문시장에서 만난 대학생들과 잠시 나눈 한담 내용을 전하고 싶다.
포장마차식 간이음식점에서 냄비우동을 먹고 있을 때 마침 젊은 커플이 내 옆에 앉았다. 나는 그들이 회사 일을 마치고 나온 커플인지 대학생 커플인지 궁금했다. 그들이 귀찮아할지 모른다는 걱정이 있었지만 나는 기어이 물어보았다. 연인인 듯한 그들은 다행히 살갑게 웃는 표정을 지으면서 자신들이 대학생이라고 대답했다.
혹시 나를 ‘꼰대’라고 생각할까 봐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말이 시작된 김에 나는 어느 대학에 다니는지 물었다. 지방의 젊은이들이 취직하기 위해 서울과 수도권으로 떠나는 현실을 대학생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는 그들의 입을 통해 듣고 싶었다.
둘 다 키도 크고 잘 생겼으며 착해 보이기까지 하는 학생들이었다. 그들이 서글서글하고 대답도 잘하는 바람에 나는 대화를 지속할 수 있었다. 그들은 대학 새내기라고 하는데, 뜻밖에도 남학생은 부산대에, 여학생은 경북대에 다니고 있다고 했다. 이들은 원래 부산에서 같은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었는데, 여학생이 경북대로 오게 되어서 헤어지게 되었으며, 지금은 서로 부산과 대구를 오가면서 만나고 있다고 했다. 남학생은 기계공학을, 여학생은 건축학을 전공한다고 덧붙였다.
나는 그 대학들이 과거에는 모두 한국에서 톱 10 대학에 들어가는 명문대라고 말했다. 지금은 모든 권력과 부와 혜택이 너무나 서울에만 편중되어 있어서 교육에서마저 서울에 있는 대학들만 높이 평가되고 있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다. 예전에는 지방에 있는 국립대학들이 매우 높은 명성을 얻었었다. 그러나 그들은 마치 그런 말을 처음 들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또는 과거야 어떻든 지금은 아니라는 표정이었다. 나는 그들이 자신들의 대학을 낮게 평가하는 듯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아직 대학 1학년에 불과해서 졸업 후에 관해 세부적인 계획을 세우지 못하고 있지만, 그들 역시 대학을 졸업하면 취직하기 위해 부산과 대구를 떠나야 할지 모른다고 말했다. 나의 생각을 길게 설명할 여유는 없었지만, 나는 뭔가 안타까웠고, 그들이 자신들의 대학에 자부심을 갖기를 바랐다. 나아가, 졸업 후에는 그들이 부산이나 대구에서 일자리를 찾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또는 부디 이 도시들에서 그런 경제 환경이 마련되기를 진정으로 바란다.
젊은 엘리트들이 대학만 졸업하면 어떻게 해서든 서울로 가려고 하는, 한국의 처참한 현실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서울이 블랙홀처럼 지방의 엘리트들과 부를 빨아들이는 불공평한 현실을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까. 지난 수십 년간 서울과 지방간 경제적 문화적 격차는 벌어지기만 하는데, 서울의 권력층은 말로만 개선하겠다고 떠들 뿐 실제로는 이러한 불공정과 불평등을 개혁할 의지를 발휘하지 못해 왔다.
대화를 지속하느라고 그들이 음식을 먹는 것을 거북해하는 듯해서, 나는 “자꾸 말을 걸어서 미안하다”라고 말하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오기 전에, 가을학기부터 대구로 올라와서 자취하고 있다는 여학생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대구에서 근대문화마을’에 가보았어요?”
“아니요.”
“그럼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은요?”
그녀는 또 머리를 저으면서 아직 안 가봤다고 대답했다. 나는 마침 내 가방에 있었던 근대문화마을 골목길 여행 지도를 그들에게 내밀었다. “다음 데이트 때는 여기로 가보세요.”라고 말하면서.
나는 진정으로 그들이 (상대적으로나마) 지방을 쑥대밭처럼 만들고 서울에 대한 열등감을 갖도록 한 어른들의 잘못을 극복하고 그들이 자란 지방에서 훌륭한 인재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나의 바람이 어떻게 가능한지 나도 모른다. 그래서 함부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저런 인재들이 모두 일자리를 찾아 부산이나 대구처럼 큰 도시까지 버리고 서울로 올라가야 한다면 그것은 한국의 불행임에 틀림없다. 인재가 모두 서울로 떠나가면 지방의 미래는 어떻게 된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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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6시가 좀 넘었고 나에게는 시간적 여유가 충분했으므로, 나는 동대구역으로 가기 전에 잠시 경상감영 건물을 둘러보기로 했다. 이미 어두워진 거리를 걸어가기에는 조금 멀었으므로 나는 지하철을 타기로 했다. 대구에서도 지하철을 탈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현재 대구 시내에는 지하철 1~3호선이 운행되고 있다.
내가 식사를 한 곳은 3호선이 지나가는 서문시장역과 2호선이 지나가는 청라언덕역에 사이에 있었고, 경상감영은 1호선이 지나가는 중앙로역 근처에 있었다. 시장 상인은 나에게 경상감영으로 가려면 청라언덕역으로 가서 1호선을 타고 반월역에서 갈아타는 게 낫다고 말했다.
지하철 역이나 기차의 모습은 서울이나 부산이나 대구나 별 차이가 없다. 다만 지하철 이용 인구에 차이가 있어서, 서울 지하철에 비해 부산이나 대구 지하철은 호선이나 차량 숫자가 적은 편이다.
경상감영은 다행히 날이 어두워도 볼 수 있는 곳이었고 사람들도 제법 있었다.
경상감영은 조선시대의 팔도 체제 하의 경상도에서 오늘의 도청과 같은 역할을 했던 곳이다. 경상감영은 조선 초기에는 경주에 위치했다가 상주, 팔거현, 달성군, 안동부 등지로 옮겨 다녔으며, 선조 34년(1601년)에 대구로 이전되었다. 조선에서 13도 제로 행정이 개편된 것은 고종 33년(1896년)부터이다.
경상감영 부지는 1970년에 중앙공원으로 조성되었고, 1999년에는 경상감영공원으로 개칭되었다. 이곳에 노인들이 많이 몰려서, 현지에서는 ‘대구의 탑골공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서울에 있는 탑골공원에 주로 노인들이 몰리기 때문이다.) 이 공원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물은 관찰사가 공무를 보던 선화당이다. 선화당 앞마당에는 꽃과 글씨로 표현되는 예쁜 불빛이 장식되어 있다. 색색깔로 꾸민 불빛은 밤이라 더욱 예뻐 보였다.
14. 새마을호도 괜찮네!
대구에서 부산으로 올 때 나는 동대구역으로 가서 새마을호 기차를 탔다.
새마을호는 KTX보다 약간 느린 것 빼고 다른 점에서는 더 낫다는 느낌이 든다. 의자도 더 좋고 안정된 느낌을 준다. 무엇보다 창문이 좌석당 따로 구분되어 있어서 좋다. KTX의 창문은 앞뒤 좌석에 애매하게 걸쳐 있다. 그래서 서울에서 부산으로 내려올 때도 나는 창문 바깥 풍경을 보고 싶었지만 동일한 창문을 이용하는 뒷좌석 승객이 창문 가리개를 내림으로써 바깥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새마을호는 KTX처럼 동일하게 큰 창문을 설치했음에도 불구하고 각 좌석이 차지하는 넓이에 맞춰서 창문을 정확히 반으로 나누어 놓았다. 그래서 창가에 앉은 승객이 각자 별도의 창문 가리개를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창문을 내다보는 것을 선택하는 데에서 중대한 장점임이 분명하다.
게다가 KTX는 오로지 빠르게 가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터널을 많지 지나게 된다. 그러나 새마을호는 터널을 통과하기도 하지만 산을 돌거나 강을 따라가기도 한다. 그럼으로써 바깥 풍경을 더 여유 있게 볼 수 있다. 그것이 새마을호가 갖는 가장 중요한 장점일지 모른다.
급한 일이 아니라면, 여행은 조금 천천히 다니면서 더 많은 것을 보는 게 좋다.
그러니, 시간적으로 급하지 않다면, 또 대구와 부산 거리 정도라면, 요금도 더 저렴한 새마을호를 이용하는 것이 좋은 선택일 것이다. (무궁화호는 아직 타지 않아서 비교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