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한 달 살기 11월 2일
당신도 때때로 고전음악을 듣는 사람이면 좋겠다.
나는 기본적으로 음악을 사랑하는데, 특히 고전음악을 좋아한다.
대구문학관에 들어간 지 겨우 이십 분 정도 지났을 때 곧 문을 닫겠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하므로 나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버튼을 누르려고 보니 지하층에 ‘녹향’이라는 단어가 보였다.
녹향? 정말?
여기 녹향이 있다고?
혹시, 하면서 나는 곧바로 그곳으로 갔다. 놀랍게도 정말로 고전음악감상실 ‘녹향’이 거기에 있었다. 전혀 예상하지도 계획하지도 않고 문학관을 찾아갔던 나는 거기에서 아주 우연히 한국 최초의 고전음악 감상실을 발견한 것이다.
'고전음악감상실'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요즘처럼 인터넷으로 듣고 싶은 거의 모든 음악을 마음껏 들을 수 있는 시대에 고전음악감상실에 가는 것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고전음악감상실에 관해 간단히 말하면 이렇다. 예전에는 음악을 듣고 싶다고 해서 모두 들을 수 없었다. 라디오는 제한된 시간에만 클래식 음악을 들려주었다.
클래식 음악을 듣고 싶은 사람들은 처음에는 카세트테이프와 LP판을, 나중에는 CD를 사거나 빌려서 들을 수 있었다. 그렇게 고전음악 감상에 목마른 사람들을 위해서 마련된 장소가 고전음악감상실이다.
고전음악감상실은 오로지 클래식음악을 감상하는 곳이다. 그곳에 가면 대형 스피커가 있었고 오로지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넓은 홀과 의자가 있었다. 집에 그런 시설을 갖춘 사람은 거의 아무도 없었으므로, 큰 소리로 고전음악을 듣고 싶은 사람은 고전음악감상실을 찾아갔다. 클래식음악을 들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다실에서 주스를 마시면서 대화도 할 수 있었으므로 그곳은 고전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오늘날의 카페와 같은 역할을 하기도 했다.
녹향은 한국전쟁 시기에 대구로 피난 왔던 예술가들과 문인들이 즐겨 찾는 보금자리였다.
녹향은 일제강점기에 고전음악을 사랑한 이창수 선생이 광복 직후인 1946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문을 연 고전음악감상실이다.
원래 녹향은 고전음악을 좋아했던 이창수가 SP 레코드판 500여 장과 축음기 1대로 향촌동 자택 지하에 문을 열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문인들은 이곳에서 음악을 듣고 시를 쓰고 낭독회를 열었다.
녹향은 1960년대 이후 경영난으로 장기간 어려움을 겪다가 2014년 대구문학관이 개관되면서 대구시와 문인 예술가들의 도움을 얻어 이 건물 지하실에 새롭게 문을 열었다.
옛날이야기지만, 녹향에서 화가 이중섭이 그림을 그리기도 했으며, 시인 유치환, 박두진, 박목월, 아동문학가 마해송 등도 녹향을 자주 찾았다. 녹향을 제집 드나들듯 했던 양명문은 ‘명태’라는 시를 지었으며, 그 시에 곡이 붙여져서 녹향의 창업자인 이창수에게 헌정되었다. 다소 특이한 가사와 곡조라서 가곡 ‘명태’를 예전에 많이 부르거나 들었을 것이다.
검푸른 바다 밑에서
줄지어 떼 지어 찬물을 호흡하고
길이나 대구리가 클 대로 컸을 때
내 사랑하는 짝들과 노상
꼬리치고 춤추며 밀려다니다가
어떤 어진 어부의 그물에 걸리어
살기 좋다는 원산 구경이나 한 후
이집트의 왕처럼 미라가 됐을 때
어떤 외롭고 가난한 시인이
밤늦게 시를 쓰다가 소주를 마실 때 (카~~~)
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다
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
짜악 짝 찢어지어
내 몸은 없어질지라도
내 이름만 남아 있으리라
명태(- 헛 명태라고 헛)라고
이 세상에 남아 있으리라.
문학관이 닫는다는 안내방송이 이미 5분 전에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무작정 문학관 지하실로 내려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복도를 돌았을 때 녹향 유리 출입문을 발견하고 들어섰다. 문학관은 6시에 폐관하므로 나에겐 5분도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녹향에는 먼저 다실 공간이 있고, 그곳을 지나면 음악감상실이 있다. 음악을 크게 들을 때는 보통 두 공간 사이에 문을 닫아서 구분한다. 감상실에서는 큰 스피커를 통해서 음악을 듣고, 차를 마시는 공간에서는 음악을 듣다가 나와서 쉬거나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할 수 있다.
엘리베이터에서 나온 나는 흥분과 긴장 속에 다실 공간에 들어갔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내가 찍은 사진에서 보니까 한 남성이 사무실에 있었지만 그때는 미처 보지 못했다.) 나는 곧바로 문이 열려 있는 감상실로 들어갔다. 감상실 내부에는 많은 의자들이 줄지어 있었고, 앞에는 피아노까지 갖춘 작은 무대가 보였다. 마침 가장 앞에 있는 큰 스피커에서 오케스트라 음악이 웅장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감상실 중간쯤에 웬 중년 여인이 혼자 앉아 있었다. 내가 들어서는 소리가 들렸으므로 그녀는 고개를 돌려 보았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내가 갑자기 들어섰는데도 그 여인은 별로 놀란 기색이 없어 보였다. 나는 자동적으로 살짝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목례를 했다. 그녀도 얼굴에 살짝 미소를 짓고는 다시 앞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다행이라 생각했다. (일반적인 한국인들은 낯선 사람에게 저렇게 인사를 하면서 미소를 짓지 않는데!)
나는 그녀로부터 조금 떨어진 뒤쪽 의자로 가서 앉았다. 문 닫을 시간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원래 그런지 모르지만, 감상실 내부는 예상보다 밝은 편이었다. 의자에 앉으면서 나는 그 짧은 순간에 고전음악감상실에 들어와서 앉았다는 생각에 가슴이 살짝 떨리는 듯했다. 그러면서도 저 여인에게 실례가 되지 않았을까, 또는 혹시라도 그녀가 나를 나쁜 사람으로 보지 않았을까, 하는 별별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러나 그런 잡념도 잠시였다. 나는 곧 눈을 감고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음악을 들었다. 오래된 추억이 되살아나는 감개무량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아주 잠시 숨을 돌리면서 음악을 듣고 있을 때 한 중년 남성이 감상실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어떻게 오셨지요? 문 닫을 시간인데..."
“아, 죄송합니다. 이곳에 고전음악감상실이 있는지 모르고 왔다가 우연히 발견하고 반가워서 무조건 들어왔습니다.”
“녹향이 여기에 있는 것을 모르고 오셨나요?”
“전혀 모르고 왔습니다. 문학관에 들렀다가 우연히 발견했어요. 여기는 처음이지만, 예전 학창 시절에 즐겨 갔던 르네상스가 기억나서 너무 반가운 나머지 그만…”
“아, 종로에 있던 르네상스요?’
“네 오래전에 문을 닫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렇지요.”
고전음악감상실 ‘르네상스’는 40년 전에 문을 닫았다.
종각역 근처에 있었던, 서울에서 가장 유명한 고전음악감상실이었다.
그 르네상스 역시 대구에서 시작됐다.
르네상스는 한국전쟁이 한창이었던 1951년 가을, 대구역 앞 행촌동에서 문을 열었다. 이 고전음악감상실을 연 사람은 디스크 수집가인 박용찬이었다. 르네상스는 그가 바이올린을 공부하기 위해 일본 유학 시절 자주 들렀던 음악살롱의 이름을 딴 것이다. 그는 1940년 일본에서 귀국할 때 무려 8천 장의 디스크를 20여 개의 트렁크에 담아서 왔다고 한다. 1.4 후퇴 때 그 디스크 8천 장을 두 대의 트럭에 싣고 대구 행촌동으로 왔으며 르네상스를 열었던 것이다.
르네상스는 한국전쟁 후에 서울 인사동으로 이사 갔다가, 1962년에 종로 1가 영안빌딩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때 르네상스에 미국의 ‘JBL-하츠필드’라는 대형 스피커가 설치됐다. (1950년대에 나온 하츠필드(Heartsfiled) 스피커는 당대 최고의 스피커였다. 1952년 극장용 음향 시스템으로 개발된 후 1954년부터는 일반 가정용 스피커 시스템으로 판매되기도 했다.)
이 스피커가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모르지만, (믿거나 말거나) 당시 동양권에서는 유일하게 르네상스만 갖고 있는 진품이었다고 한다. 그때가 르네상스의 최고 전성기였다. 그랬던 르네상스는 결국 경영난으로 1983년에 문을 닫았다.
르네상스가 닫기 직전, 고등학교 3학년 초에 나는 그곳을 알게 되었고, 재수생 시절과 대학 1학년 때 자주 찾았다. 고전음악을 좋아해서 그렇기도 했지만, 삶에 지치고 고단하거나 고민이 있을 때마다 나를 달래려고 갔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니, 그런 감상실은 나에게는 그냥 고전음악을 좋아하느냐의 문제로만 가는 곳이 아니다. 나에게는 마음의 오래된 정원과도 같은 곳이고 젊은 날의 깊은 추억이 서려 있는 곳이다.
녹향에서 잠시 만났던 남성은 아마 녹향 창업자인 부친 이창수(1922~2011)의 아들이었을 것이라고 나는 나중에 짐작했다. 녹향에 관해 조사한 바로는, 부친 이창수의 사후에 그의 셋째 아들 이정춘이 기꺼이 녹향을 맡아서 고전음악감상실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오늘날 고전음악을 좋아하고 각종 악기를 훌륭하게 연주하는 사람은 많아졌지만, 고전음악을 사랑하여 그 음악을 듣겠다고 굳이 음악감상실을 찾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옛 추억을 잊지 못하고, 굳이 먼 곳까지 찾아가서 낡은 의자에 앉아서 거대한 음향으로 전해지는 고전음악을 듣고 싶은 올드보이, 올드걸들이 얼마나 남았을까. 자기가 원하는 거의 모든 음악을 언제나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이 시대에 그렇게 발품을 팔아서 고루한 음악을 듣겠다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과거에 비해 클래식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과 클래식 음악 인구가 엄청나게 늘어났지만, 그런 생각을 하면 괜스레 마음이 무거워진다. 현대식 스타일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녹향에서 나는 다시 한번 오래된 마음의 정원을 거닐고 나온 느낌이었다.
어쩌면 대구를 찾은 후 가장 큰 행운이었다.
녹향을 방문한 것이.
그러나 그것은 5분도 채 되지 않는 아쉬움이었다. 만약 일찍 알았다면, 나는 녹향으로 와서 적어도 한 시간은 앉아 있었을 것이다.
문 닫을 시간이라고 말하는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못한 채 나는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아직까지도 고전음악감상실을 운영하는 그에게 안녕히 계시라거나, 나중에 다시 들르겠다거나, 녹향이 계속 잘 존재하기를 바란다는 말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감상실을 나오면서 나는 그저 "이렇게 녹향이 있어서 좋네요.'라는 말만 던지고 아무도 없는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문학관 밖, 대구의 낯선 거리에는 이미 짙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나는 문득 어디로 가야 할지 길을 잃은 것처럼 멍한 기분이 들었다. 녹향의 진한 여운이 남아서 선뜻 자리를 뜨기가 싫었지만 그 거리에서 계속 서 있을 수는 없었으므로, 나는 괜스레 서글프고 쓸쓸한 마음이 되어 천천히 발길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