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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이야기 4
(근대문화마을과 근대역사관)

부산에서 한 달 살기 11월 2일

by memory 최호인

8. 계산성당


내가 계산성당이라고 부른 교회의 정식 명칭은 천주교대구대교구 계산 주교좌 대성당이다.


1898년에 본당을 세운 이 성당은 경상도 지역에서 처음으로 건설된 서양식 성당이다. 원래는 성공회 강화성당과 마찬가지로 한옥식 건물을 지었지만 1901년 전소된 후 새로운 고딕 양식의 성당으로 건축한 것이다.


이 건물은 서울의 명동성당과 전주의 전동성당을 설계했던 프와넬 신부가 맡았다. 계산성당은 또한 서울 약현성당과 명동성당에 이어 세 번째로 건립된 고딕풍 로마네스크 양식 성당이다. 그래서 계산성당은 한국의 3대 성당이라고 자부하고 있다.


이 성당은 1911년 주교좌성당으로 지정되었고 1918년 종탑의 높이를 두 배로 올리는 등 교회 증축 공사를 했는데, 이때 건설된 건물이 오늘날 우리가 보는 교회 모습으로 남았다. 햇빛이 비칠 때 더욱 아름답고 다채로운 빛을 보이는 이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는 초기에는 기독교의 열두 사도를 표현했지만, 1991년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하면서 한국의 순교자들도 포함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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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조선에 순교자가 많은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조선의 기독교 전파는 18세기 후반에 평신도들에 의해 기독교가 수입되고 연구되면서 신앙이 발전했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하다. 아프리카와 남미뿐 아니라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서 우리나라처럼 외부로부터 사제 파견에 의한 전도과정 없이 평신도들에 의해 먼저 기독교가 연구되고 전파된 나라는 없다. 그것이 조선 기독교 발전의 가장 특이한 성격일 것이다.


기독교 신앙과 교리는 후기 조선사회의 주류 문화인 유교적 가치 및 제도와 충돌했으며, 그 과정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박해 및 순교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나 조선의 순교 역사를 과장해서 말하고 싶지는 않다. 18세기말 조선에서 기독교가 전파되는 가운데 발생한 순교는 사실 로마교황청의 잘못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 교황청은 1715년에 유교문화에 입각한 제사 문화를 우상숭배라고 해석하여 교인들에게 불허했다. 이로 인해 처음에는 서학에 비교적 관대했던 조정은 공공연히 제사를 거부하는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게 된 것이다.


그로 인해 양반들이 기독교에서 먼저 이탈한 가운데서도, 19세기 초반 조선의 기독교는 중인과 평민들을 중심으로 빠르게 전파되었다. 그러나 병인양요(1866년)에 이르러 크게 분노한 흥선대원군은 쇄국정책을 펼치면서 천주교인 수천 명을 참수했으며 이때 무명의 순교자들도 많이 발생했다. 서울 양화나루 일대의 '절두산 순교참사'와 충청남도 서산의 '해미읍성 집단 생매장' 사건은 이때 발생한 것이다.


조선에서 기독교 전파 과정이 특수하기도 했고 순교자들이 다수 발생함으로써 로마교황청은 조선의 기독교를 매우 존중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교황청에서 엄격한 심사와 절차에 의해 정해지는 ‘성자’와 ‘복자’도 많아진 것이다.


계산성당에 관한 낯선 여담 하나.


성스럽고 엄숙해 보이기만 하는 계산성당 앞마당에 엉뚱하게도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혼인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이들은 1950년 12월 12일 이곳에서 결혼했다. 박정희는 무종교이고, 육영수는 불교신자라서 원칙적으로 성당에서 결혼이 허용되지 않지만, 당시는 전쟁 중이라 결혼 장소를 빌릴 곳이 마땅치 않은 가운데 이런 해프닝이 벌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 혼란기에 어쩌다 그들의 혼인식이 이곳에서 거행됐다 해도 이 신성한 종교 장소에서 왜 굳이 앞마당에 이런 사진을 전시해 놓은 것일까. 대구라서 그런 것일까. 나는 그것이 궁금했으나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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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김원일의 마당 깊은 집 기념관


계산성당으로 가기 전에 김원일의 마당 깊은 집 기념관이 있었다. 소설가 김원일의 대표작이 1988년 발표된 ‘마당 깊은 집’이다. 김원일은 1942년 경남 김해군 진영면에서 태어났다. ‘마당 깊은 집’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과 1955년에 걸쳐 대구에서 작가가 경험한 자전적 소설이다.


소설가 박완서가 한국전쟁 시기에 경험한 처참한 피난 생활을 다수의 소설로 만들어낸 것과 달리, 김원일의 마당 깊은 집은 전쟁의 참상보다는 전후 빈곤에 찌든 일상을 아기자기하고 담담하게 풀어내고 있다.


나는 이미 20여 년 전에 그 책을 읽어서 줄거리도 잘 생각나지 않는 소설이다. 이 소설은 주인공 소년 남길의 눈을 통해 한 마당을 사용하는 피난민 가족들의 고단한 생활상을 꽤 담담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소설은 나중에 TV 드라마로 방영되면서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이 소설을 읽을 때 나는 책 안에서 전쟁의 극적인 참상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없었지만 김원일의 탁월한 문장력에 감탄했었다. 그의 글은 너무나 유려한 문장들이었다는 것만 기억하고 있다.


근대문화마을에 꾸며진 이 마당 깊은 집은 물론 예전에 실제로 김원일이 살았던 집은 아니다. 이 아담한 주택은 TV드라마에 나왔던 집을 문화관광 진흥 차원에서 재현해 놓은 기와집이다. 입구에 미처 알아채기도 어려운 표식이 있는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면 ‘김원일의 마당 깊은 집’이라는 현판이 붙은 집이 나온다. 집 안으로 들어가면 방과 거실을 따라가면서 소설의 내용을 담은 전시물과 영상물, 김원일의 소설과 원고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런데 그 소설을 읽지 않은 사람이 와서 본다면 글쎄…

굳이 이 집을 가봤자 무엇을 느낄 수 있을는지, 이 집을 어떻게 생각할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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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대구근대역사관


근대문화마을을 돌아서 대구근대역사관에서 나올 때는 이미 해가 저물고 있었다. 원래는 이곳을 빠르게 걸은 후에 서문시장을 방문하고, 다시 앞산으로 가서 케이블카를 타고, 이어서 수성못으로 가서 야시장까지 볼 계획을 세웠었다. 또는 그렇게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침에 탔던 시티투어버스 운전기사는 내가 이렇게 근대문화마을에서 시간을 지체할 것을 알지 못했으므로 나에게 서문시장을 본 후 청라언덕역에서 5시에 시티투어버스를 타고 앞산으로 가라고 했었다. 다시 말하자면 그 시티투어버스는 오후 다섯 시 무렵에 마지막 버스가 지나갈 예정이었는데, 계산성당을 나올 때 이미 다섯 시가 넘었던 것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보면, 시티투어버스는 아침에 동대구역에서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까지 딱 한 번 타고 만 셈이다. 시티투어버스를 이용하는 것은 나 같은 여행객에게는 실용적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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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앞서 대구제일교회 100주년 기념관에서 일하는 분은 나에게 좋은 조언을 주었다. 그녀는 나의 대구 여행 사정을 듣고 나서, 내가 오후 8시 14분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돌아가려면 앞산이나 수성못까지 갈 시간은 없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계산성당까지 보고 나서 대구근대역사관으로 가보라고 권했다. (어쩌면 그녀는 내가 교회 유물을 유심히 살펴보는 것을 관찰한 후, 앞산이나 수성못으로 가는 것을 더 좋아할 사람은 아니라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그런 권고는 사실 그녀의 인생관 또는 가치관을 반영하는 것이지, 객관적으로 말해서 모든 관광객에게 정말 더 좋은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녀가 나를 역사 탐방과 박물관 방문을 그저 반복적이고 지루한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여겼다면, 아마 나에게 빨리 앞산으로 가서 케이블카를 타라고 하거나 수성못으로 가서 야시장을 즐기라고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말하지 않고 대구근대역사관이 가볼 만한 곳이라고 말했다.


그러니, 내가 그녀를 만나서 여행 일정을 논의하게 된 것은 우연한 일이지만, 그녀는 오늘 나에게 중요하고 의미 있는 선택을 인도해 준 것이고, 어쩌면 그것이 나비효과를 일으켜 나의 인생에 큰 파장을 일으킬 수도 있었던 것이다. 나는 오늘 그녀가 나에게 권한 제안의 결과에 만족한다.


당신이 하는 모든 선택이 그럴 수 있다.

우연이 겹쳐서 필연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우연은 종종 나의 계획과 운명을 바꾼다.


그러므로 당신의 주변에 당신이 선택하지 않은 무수한 우주가 존재할 수 있다는 상상도 가능하다. 모든 선택과 모든 경우의 수가 이미 존재해서 당신 앞에 놓여 있다면 그럴 수도 있다는 상상 말이다. 아무튼 나는 친절한 그녀의 말을 믿고 계산성당에서 곧바로 골목투어길 1코스에 있는 대구근대역사관으로 향했다. 물론 그리 멀지 않으니 걸어서 말이다.


대구근대역사관은 1932년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으로 지어진 건물을 사용하고 있다. 이 건물은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상 2층, 지하 1층으로 예쁘게 건축되었으며, 2011년 개관했다. 이 역사관에 와서 사진들과 디지털 영상들을 잘 살펴보면 대구의 역사를 잘 이해할 수 있다.


대구의 역사와 옛 모습을 설명하는 전시물과 영상물을 모두 훑어본 나는 1층 프런트데스크에서 길을 묻다가 다시 한번 우연하게 나의 대구 여행에 관한 조언을 들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조금 미안하지만, 오늘 여행한 결과, 대구의 보통 사람들은 조금 불친절한 듯하지만 여행 관련 직원이나 박물관 직원들은 친절한 편이다. 물론 이런 개인적 경험을 일반화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하루에 겪은 내 경험과 느낌을 일반화해서 말할 의도는 없다.


대구근대역사관의 프런트데스크 직원은 친절하게 지도까지 그려주면서 나에게 서문시장까지 갈 시간이 없으니, 당장 대구문학관과 향촌문화관으로 가보라고 권했다. 문을 닫기 전에 가보라는 말이었고, 대구 출신 문인과 예술가들이 많아서 가볼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 문학관과 문화관은 다행히 한 건물에 있었다. 그녀는 아무래도 내가 길을 헤맬 것처럼 걱정이 되었는지, 박물관 밖까지 나와서 길거리에 서서 나에게 갈 길을 가리켜주었다. (그래서 이 자리를 들어 나에게 새로 갈 길을 권해 준, 이름을 잊은 두 여성 직원에게 감사를 표시한다.)


귀가 얇은 탓인지… 나는 또 그녀의 권고를 따르기로 했다.

서문시장이야 부전시장과 비슷한 전통시장이려니 생각하면서. (하긴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어느 전통시장이 별다르게 보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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