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한 달 살기 11월 3일 매우 화창
오늘도 매우 화창한 날이다.
침대에서 느긋하게 일어나서 통창에 환하게 비치는 하늘빛을 바라본다.
10월이 끝나고 11월이 되었는데도 부산 시내의 나무들은 여전히 푸르다.
오래된 나의 기억...
10월은 언제나 푸르고 아름다운 계절이었지만 11월은 거의 옅은 회색과 같았다. 11월이 되면 맑고 푸른 날이 거의 없었다는 말이다. 비라도 내릴 듯 하늘은 늘 흐렸고 무거운 구름이 몰려다녔다. 이따금 맑은 날, 짙푸른 하늘에서 쏟아지는 투명한 햇빛은 이미 퇴색하는 붉고 노란 나뭇잎들에 아롱졌다. 날마다 조금씩 차가워지는 바람이 나뭇가지를 못 살게 뒤흔들었고, 나뭇잎들은 힘없이 떨어져 거리로 휘날렸다. 비가 내리는 날에는 낙엽들이 보도에 달라붙어 거리를 지저분하게 하는 애물단지가 되었다.
또 맑은 날, 그러나 바람이 몹시 부는 날, 젖었다가 다시 마른 낙엽들은 우수수 소리를 내면서 몰려다녔으며, 행인들은 바짝 차가워진 바람을 막느라 옷깃을 여몄다.
고등학생 시절, 나는 늦가을이면 경복궁과 덕수궁의 돌담길을 찾아가곤 했다. 밟을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낙엽들 위로 걷는 것은 얼마나 내 마음을 쓸쓸하게 했던가. 첫눈이 오면, 첫 함박눈이 펑펑 내리면, 좋아하는 사람에게 덕수궁 정문 앞에서 만나자고 말하고 싶었다. 흰 눈 덮인 덕수궁을 함께 걷고 싶었다.
그렇게 고독과 낭만을 그리워했던 시절은 지나가고…
2023년 10월 부산의 가을은 매우 맑기만 했다. 이제 11월이 시작되었으니까, 내가 어렸을 때처럼 앞으로 흐린 날이 늘어날지 모른다. 광안리 해변에서 불꽃놀이 축제가 예정된 내일만 해도 비가 내릴 것이라는 예보가 나왔다. 그것은 어쩌면 11월에 이어질 날들도 흐린 계절이 될 것이라는 신호탄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내가 서울을 떠난 후 11월 중순 들어 한국의 기온은 뚝 떨어졌으며 날씨도 급격히 흐려졌다!)
아무튼 부산에서 서울과 달리 아쉬운 게 있다면 덕수궁과 같은 고궁이 없다는 것이다. 경복궁과 덕수궁 돌담길을 걸었던 아름다운 추억을 부산에서는 만들 수 없다. 고궁이 없는 것은 부산이 가진 약점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거꾸로 부산이 서울과 달리 가지고 있는 장점 가운데 하나는 바다를 한없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부산에 온 후 거의 쉴 새 없이 도보 여행을 다녔다. 이것은 원래의 계획은 아니지만, 워낙에 매일 날씨가 좋다 보니 무리라고 느끼면서도 나는 계속 어딘가를 찾아서 걸어 다녔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부산에서 관광객들에게 유명한 곳은 거의 다 돌아다닌 셈이다.
도시에 따라 또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부산은 두 주 정도면 유명 관광지를 모두 볼 수 있다. 세부적으로 보자면 끝도 없겠지만 외지인이 낯선 도시에 가서 그렇게 세세하게 구석구석까지 찾아볼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부산에서 이 정도로 다닌 것만 해도 매우 다행이라 생각한다.
서울에 처음 여행 온 사람이라 해도 유명 관광지만 다닌다면 보름 정도면 족할까.
표면적으로만 둘러보고 주요 관광지에서 사진만 찍는다면 그 정도면 될 수 있을 듯하다.
부산과 서울 이외에 다른 대도시는 어떨까.
6년 전인가 프랑스 파리에 갔을 때는 일주일 만에 유명 관광지 십여 곳 정도를 선정하여 돌아다녔다. 그야말로 관광객들에게 가장 유명하다는 곳만 찾아다녔다. 그 정도면 파리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를 그냥 훑어보기만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정도 기간으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로 파리를 세부적으로 볼 수 없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파리 같은 도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1주일이 아니라 여러 달 있어야 할 것이라고.
미술이나 건축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파리에서 1년간 지내도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고 여길 수도 있다. 세부적으로 보자면 오르세미술관이나 루브르박물관에서 1년을 지내도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할 수도 있다. 파리에서 사나흘 간 볼 수 있는 것은 관광지의 외적 규모나 생김새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파리를 방문했을 때, 나는 나중에 언젠가는 파리로 다시 와서 두세 달 정도 살기를 하면서 프랑스 대혁명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로베스피에르와 당통을 중심으로 해서 말이다. 그러자면 뉴욕에서 미리 프랑스 대혁명 역사를 다시 충분히 공부하는 것이 선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그래서 로베스피에르와 당통에 관한 중고책들을 사기도 했다. 너무 두꺼운 영어책이라 한 권도 제대로 읽지 못했지만!)
뷔히너의 희곡을 읽어 보니, 이백여 년 전 혁명 열기가 들끓던 파리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겨우 30대 나이의 혁명 지도부는 고민했다. 봉건 왕조를 마감시키고 부르주아 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단계에서 혁명을 일단 중단해야 하는가, 그것이 당대의 시대적 사명 또는 지속적 혁명의 한 단계였는가, 아니면 무리할지라도 그 이상으로 전진해야 하는가. 수많은 계급과 이익집단들의 갈등과 압력 가운데 혁명 지도부는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하는가!
급변하는 파리의 정세를 놓고 노선과 사상의 차이로 권력투쟁이 가속되는 가운데 혁명 지도부의 대부분은 그들이 루이 16세를 처형했던 단두대 위로 올라가야 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당통도 로베스피에르도!
이 같은 역사소설을 쓰려면 당대 프랑스에 대한 엄청난 역사적 지식과 문학적 상상력과 필력을 요구함이 분명하므로, 이를 소설화하려는 나의 상상은 이제는 순전히 헛된 욕심에 불과해졌다. (나중에 살펴보니, 한국에서는 이미 소설가 서준환이 2013년에 [로베스피에르의 죽음]이라는 소설을 발표했다. 그의 소설은 게오르크 뷔히너의 희곡 [당통의 죽음]을 본떠서 만든 작품으로 보인다.)
여행은 종종 그렇다.
겉핥기로 다니자면, 하루에도 유적지나 관광지를 두세 곳씩 다니면서, 인증샷을 찍고 (요즘 유행하는 여행지 스탬프) 수첩에 부지런히 도장을 찍으면서 다닐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당신은 여행에 관한 무용담을 타인에게 끝도 없이 풀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부산에서 이틀간 지낸 후 2년간 부산에 관해 아는 척하고, 파리에서 일주일간 돌아다닌 후 7년간 파리에 관해 남들에게 장황하게 설명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군대에서 30개월을 보낸 후 30년간 군대 생활에 관해 떠드는 남성들도 많지 않은가.
여행의 깊이를 더하자면 끝도 없다.
그런 점에서 나는 부산에 관해 헛소리를 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단지 부산의 주요 관광지를 열심히 돌아다녔을 뿐이다. 겨우 보름 만에 부산과 부산 주민들과 부산의 역사와 문화를 제대로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뭔가를 안다고 말하는 것은 어차피 상당히 주관적인 주장에 불과하므로 나는 나대로 평가를 내릴 수 있을 뿐이다. 나는 부산을 잘 알게 됐다는 식으로 말하고 싶지는 않다. 부산은 매우 매력적이고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도시이며, 풍부한 역사적 문화적 유산을 가지고 있다.
나로서는 지난 3주간 부산의 표면 정도만 대충 알게 됐다는 정도로 말할 수 있을 뿐이다.